🙋🏻♀️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틈틈이 읽었는데)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사무실을 벗어나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에 발붙인 소설과 완전히 현실을 벗어난 세계를 그리는 소설이 골고루 든 앤솔로지라서 좋았다. 가제본에는 문지혁 소설가와 심완선 평론가의 글이 없는데, 정식 출간본을 사서 해설과 기획의도를 마저 읽고 싶어졌다!
💙 내 픽은 <얼음을 씹다>, <차가운 파수꾼> !
🧊#곽재식 #얼어붙은이야기
상당히 설명적인데도 동시에 박진감 있는 이야기다. 무언가에 쫓기며 급하게 차를 몰고 가다가 트럭에 치여 죽을 뻔한 ‘나’에게 ‘생사귀’가 찾아오고 시간이 얼어붙는다. 생사귀는 이참에 시간을 돌리면 ‘나’를 살릴 수 있지만, 그 대가로 무려 은하계 10개 정도의 우주가 파괴되므로 여태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신중히 결정하라고 당부한다. 도입부가 흥미로웠고 ‘역시 곽재식’이라고 생각했다.
🧊#구병모 #채빙
얼음 속에 갇힌 어떤 존재가 신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움직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얼음 바깥의 소리를 듣고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를 ‘사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현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립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시간이 더 흘러 그를 ‘생존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 모든 일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진절머리” 나지만 ‘얼음새꽃’을 통해 그의 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남유하 #얼음을씹다
빙하기가 시작되고 120여 년이 지났다. 불모지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제 인육 먹기를 당연시하게 되었다. ‘유리아’는 작년에 남편을 잃고 올해는 딸을 잃었다. 시체는 남은 가족들이 먹는 것이 원칙이지만 유리아는 차마 딸의 몸을 먹을 수 없어서 도망친다. 척박하고 강압적인 사회에서 저항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요약하면 좀 납작한가…) 자체가 흥미로웠다. 단편소설 분량 내에서 주변 인물들의 인생사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게 아쉬워서 레일라, 알렉, 틸다의 이야기를 장편소설 버전으로 더 읽고 싶어졌다.
+작중 직접 등장하지 않는 ‘틸다’는 외지인이고 온실에서 커피를 재배한다. <지구 끝의 온실> 오마주인가?
🧊#박문영 #귓속의세입자
2034년 제25회 월드컵. 한국은 프랑스를 꺾고 4강에 올랐다. ‘해빈’은 해외 출장을 나왔다가 월드컵의 열기에 휩쓸린 상황을 불쾌하게 여긴다. 귓속의 세입자 역시 열기가 넘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온기 때문에 행성 문명의 일부가 파괴”된 곳에서 온 외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관중석에 앉은 해빈의 스트레스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세입자는 잠시 시간을 얼려 버린다. 해빈은 그 틈에 축구 선수들과 관중들의 엉망진창인 얼굴을 관찰한다. 그리고 문득 인간을 혐오했던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사실 해빈의 내적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귓속의 세입자가 12분 31초만큼 시간을 얼렸을 때, 해빈의 변화는 (지면상)단 6줄 사이에 일어난다. 뭔가 많이 생략된 느낌이라 아쉬웠지만, 군중 속에서 피로해하는 해빈의 성향에 내내 공감하며 읽었다.
🧊#연여름 #차가운파수꾼
‘선샤인’은 냉기를 내뿜는 존재이다. ‘노이’는 한 번도 그를 대면한 적 없지만 이모의 유언에 따라 선샤인을 챙기며 삶의 터전을 유지한다. 노이는 삭막한 세계에서 모든 관계가 ‘거래’라고 믿는 인물이다. ‘이제트’는 거래뿐만 아니라 호의를 베푸는 친구로서 노이와 관계를 이어나가는 인물이다. 노이가 이제트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 노이와 이제트가 선샤인을 대하는 태도에 주목하며 읽었다. 캐릭터가 분명한 소설이라 이 앤솔러지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천선란 #운조를위한
‘운조’는 동물을 죽이거나 살리는 데 크게 동요하지 않는 수의사이다. “어쨌든 나는 그저 직장인으로서 할 일을 다 한다.”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대변할 수 있겠다. 운조가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귀 한쪽이 짧고 눈이 붉은 토끼 ‘로타’를 키우다가 죽였을 때부터 마음의 짐이 쌓이기 시작한 듯하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한 사고로 인해 먼 미래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로타’라고 이름붙인 생명체 덕분에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 운조는 또 다시 시간 여행을 하고 다시는 갈 수 없는 유토피아를 그리워한다.
이게 SF가 맞나? 그냥 판타지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 소설이다. 장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읽으면 아련하고 따뜻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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