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떡만 씹던 개는 ‘내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수정을 쳐다봤다. 그리고 수정이 저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싱겁다는 듯 이내 고개를 돌렸다. 수정은 다시 내일이라고 말해 보았다. 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보름달 같은 눈으로 수정을 봤다. 큰 귀가 위로 쫑긋 섰다.
- 너, 혹시 이름이 내일인가.
개의 거대한 귀가 뒤로 접혔다 다시 쫑긋 섰다. 수정은 왠지 그러고 싶어져서 개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한 번 더 입술을 내밀자 개가 고개를 돌렸다. 내일아, 하고 불러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귀는 돌려세웠다. 수정은 쿡쿡 웃으며 내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P23
수정아, 바로 그때 내 마음속에 죽겠다는 결심이 서게 된 거야. 나를 사랑한 적 없는 사람, 그러나 나로 인해 기쁘고 좋았던 어떤 사람에게 복수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비록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원하던 일일지라도.- P39
고이 개켜진 검은 옷 두 벌과 누르스름한 통에 담긴 도시락을 북두가 내밀었다. 도시락이란 떠나는 자가 먹는 음식이다. 수정과 이안은 그것을 받아 든다.
이안이 뚜껑을 열어 안에 든 것을 확인한다. 깨와 참기름으로 무친 고사리나물, 소금과 쪽파를 넣고 볶은 반달 모양 애호박, 고춧가루와 초간장을 뿌려 지진 두부 그리고 흰밥. 방금 입안으로 들어간 그 나물에 그 밥이지만, 내내 떡으로 연명하던 수정과 이안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처음처럼 반가울 뿐이다.- P48
- 함께 저승으로 가거라. 힘을 합쳐 문 앞에서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렴.- P49
- 나는 열아홉 살인데, 내년이 되기 전 죽을 운명이랬어. 스무 살은 죽을 나이가 아니야. 질서상 맞지 않아. 당신이 당신의 질서를 중요시한다면 우리의 질서도 중요시해야겠지. 내가 늙은 뒤에 죽을 방법을 알려 줘.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고 거대한 무질서를 만들어 낼 거야.- P59
눈물이 지난 자리로는 피가 씻겼다. 그것은 더욱 괴이한 인상을 주어,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주머니에 조금 남은 물을 오목하게 만든 손바닥에 부어 수정의 얼굴을 씻겼다.
수정은 잠자코 세수를 받았다. 오랜 세월 악사가 입을 대고 한 번도 제대로 닦지 않았을 물주머니에서는 침 냄새가 났다. 그래서 수정은 꼭, 어린 동물들이 제 부모에게 그러하듯이 혀로써 침으로써 세수를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P67
악사의 얼굴이 담임 교사를 닮았다는 사실을 수정은 깨닫는다.- P68
명부에 그려진 초상들과 이름들이 모두 바뀌었다. 대부분은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반인반수를 모아 놓은 도감처럼, 넘겨도 넘겨도 괴물뿐이다.- P82
등허리에 매달려 있던 모기-인간이 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버틴 덕에 수정은 추락을 면한다. 어깨에 올라타 있던 모기-인간도 자신의 두 다리로 수정의 목을 단단히 조이고 두 팔로는 땅의 끝을 붙든다.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수정의 무게를 떠안고 수정의 추락을 막느라 두 모기-인간의 팔다리 관절이 빠지고 손에서 피가 흐르지만 모기-인간들은 수정을 놓지 않는다.- P87
이안은 수정의 작은 칼을 뽑아 들어 두 모기-인간을 차례로 베어 죽인다. 이렇다 할 저항이나 방어도 없이, 그들은 아파하던 얼굴 그대로 죽어서 시체로 남는다.
이안이 숨을 몰아쉬며 통이 넓은 바지를 걷어 올려 물린 자국을 살피고, 수정의 목 뒤도 살핀다. 정말 모기에 물린 것처럼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눈에 띄지만 그뿐이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이안이 주저앉는다. 명부가 다시 뜨거워지지만 굳이 꺼내어 살피지 않는다.
수정은 울고 있다.
- 묻어 주자.- P88
비어 있던 마지막 장에 초상화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수정의 명부에는 이안의 초상이, 이안의 명부에는 수정의 초상이 그려진다. 서로의 얼굴이다.
이안은 자신이 수정의 삶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 꿈에서 수정을 깨워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은 이안이 그런 것들을 깨닫는 중이라는 사실을, 저 아이의 착각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느꼈다. 수정은 이안의 눈에서 예전 청소부의 눈에서 본 광기를 본다.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P96
- 망친 게 아니야.
- 그럼?
- 구한 거야. 이룬 거야.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야.
- 그럼 잔해를 떠안고 살아가. 고약한 피 냄새에, 무질서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착각하면서.
-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경고야?- P108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내 눈앞으로 휴대폰 액정 화면이 들이밀어졌다.
- 우리 집 개. 새끼 낳았어.
- 네?
아까 내 식판을 가져다준 할머니다.
- 오늘 낳았어. 그래서 이름이 오늘이.- P120
- 이 강아지, 네가 데려갈래?
- 네?
- 개 좋아한다며. 나 죽고 나면 네가 돌볼래? 할미가 그렇게 해 주면 너 다시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정확히, 내 왼쪽 손목을 겨냥한다.
-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래?- P121
8월 4일 밤. 날씨 모름.
내일은 개같다.
나는 개를 좋아한다.
홀로 뛰놀던 낮이 끝나면
우리 안에 들어가 쉬는 밤이 온다.
어떤 이별은 서로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발생한다.
칼은 나를 아프게 하는 방식으로
나를 살리거나 죽이지만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 P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