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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면부족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절어있었다. 와중에 혼절하듯이 졸면서도 이 책은 놓지 않았다. 흡인력이 엄청나다! 이런 수식어는 천선란 작가님에게는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그래도 사실이니까, 꼭 말해야겠다🥺💙
『노랜드』의 인물들은 자꾸만 무언가를 상실한다. 가까이 여기던 존재를 잃고 자기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다. 「흰 밤과 푸른 달」에서는 늑대인간이 된 명월이 우주로 떠나고, 「제, 재」에서 한 몸을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는 두 인격 ‘재’와 ‘제’가 등장한다. 「이름 없는 몸」에서는 ‘나’가 기괴하게 변해버린 마을 사람들을 맞닥뜨리고,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에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져 사라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상실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작가는 솟아날 구멍, 맞잡을 손을 작품 속에 심어두었다. 멸망에 이른 세계에서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인물들이 물리적으로 어떤 상태가 되든, 어떤 곳으로 이동하든 결국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점이 나에게는 위로로 다가왔다.
특히 「이름 없는 몸」과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가 좋았다. 이 두 작품과 분위기가 정반대인 「우주를 날아가는 새」도, 한 소설집에서 편중되지 않고 여러 층위와 방향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스포하지 않는 선에서(어렵다…) 밑줄 친 문장들을 적어본다.
「흰 밤과 푸른 달」
🔖(25쪽)그것은 늑대의 본성이라기엔 너무 파괴적이었고, 인간의 본성이라기에 너무 순애적이었다.
「옥수수밭과 형」
🔖(117쪽)만약 푸코랑 다르게 생긴 애가 본인이 푸코라고 하면서 푸코의 기억과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 애를 푸코라고 생각할 거 같아. 사람이든 로봇이든 강아지든 기억이 같으면.
「이름 없는 몸」
🔖(231쪽)너는 희멀건 입술과 뿌연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질문에도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답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네가 내 어깨를 파먹는다고 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아프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너와 함께 드디어 이 마을을 나갈 수 있겠다는 얕은 상상을 했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288쪽)부처님 다리를 빌린 그 새는 다리가 꺾인 상태로 기력 없이 효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어새였다. 이 행성에 더는 살지 않는다고 했던.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375쪽)제가 궁금한 건 왜 어떤 사람은 그 무기를 맞고 안개처럼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육신이 남느냐는 거예요(…) 왜 벤은, 제 눈앞에서 흩어졌을까요.
🔖(379쪽)어쩌면 그들은 우리와 소통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안개 속에서 헤맬 때 무언가가 우리에게 이 안개를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줬거든. 다른 병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들었어. 딱, 딱. 소리를 내며 유인하는 것을. 그것들 모두가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는 건 아니야. 모두가 적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우리처럼.
+ 편집자/작가는 이 소설집의 제목을 왜 '노랜드'로 정했을까?
'노랜드'는 「두 세계」에서 인공지능 '아락스'가 탈출하고 싶어하는 세계다. 어디론가 떠나고 벗어나려는 인물들의 방향과 이미지를 이 단어에 압축해서 담아낸 걸까 싶다.
+ 만듦새
400쪽에 달하는 분량은 '견장정(하드커버)' 제본방식으로 제작하기에 충분했다. 표지에 맞추어 가름끈도 새파란 색인 게 '고급진' 느낌이라 마음에 든다. 표지 이미지는 손정희, 전체 디자인은 형태와내용사이(홍지연) 담당.
+ 스포 아닌 스포
「옥수수밭과 형」, 「-에게」는 어쩐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419쪽에서 「옥수수밭과 형」은 《2035 SF 미스터리》, 「-에게」는 〈추적단 불꽃-우리, 다음〉에 실렸음을 확인하고 궁금증이 해결됐다...!
※ 한겨레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