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부르주아‘는 동독에서 모더니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힐비히의 경우처럼 시 분야에서 랭보나 릴케를 연상케 한다거나, 소설 분야에서 프루스트나 조이스 같은 작가로부터 영감을 받은 걸 지적할 때 쓰이는 용어였다.- P232
현실 사회주의 하에서의 삶의 조건들-그들은 동독의 평범한 민중들이 경험하는 실제 세계를 이렇게 지칭했다-을 드러내는 데 실패한 글쓰기는잘못된 것이라 여겼다.- P233
이렇게 검열은 전 출판 과정에 걸쳐 -심지어 그 이후에도- 이루어졌다. 작가와 출판사는 출판 이후에 가해지는 제재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이루어진 검열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작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문서 보관소에서 자기 검열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지만, 동독인들은 장벽 붕괴 후 발언의 자유를 얻게 되자 그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내곤 했다.- P243
1979년에 동독을 탈출한 소설가이자 문학비평가인 요아힘 자이펠 Joachim Scyppel은 작가들이 원고를 집필할 때 몹시 도발적인 구절을 고의로 심어놓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검열관들의 관심을 그 구절에 집중시켜, 원고 곳곳에 있는 문제가 될 만한 애매한 부분에서 관심을 돌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그 구절을 지키려고 격렬히 싸우는 척하다가 그 가짜 싸움에는 져주고, 자신이 진심으로 출판되길 바랐던 부분을 지켰다. 하지만 그런 게임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그 체계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순응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작은 녹색 인간이 승리했던 것이다.- P244
편집자의 역할을 이념적 문제를 걸러내는 것으로 한정하는 건 잘못이다. 그들은 원고의 미학적 수준을 향상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표현을 더 낫게 고치고 서사를 더 단단하게 가다듬기 위해 작가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들의 보고서를 읽는다면, 누구나 그들의 수준이 서베를린이나 뉴욕의 편집자와 마찬가지로 지적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평론가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했고, 많은 초고를 읽었으며, 원고에 가장 알맞은 외부 심사위원을 선택했고, 복잡한 제작 일정을 거쳐 출판까지 원고를 이끌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작성하는 문서를 읽어보면 서구 편집자들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바로 수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P246
편집자들은 시장 동향을 살펴 출판 목록을 추리는 대신, 질 낮은 작품을 걸러내는 데 집중했다.- P247
협의는 다양한 역할과 관계-작가와 편집자, 편집자와 외부 심사위원, 출판사와 출판총국, 출판총국과 당 중앙위원회 문화분과, 심지어 회프케, 호프만, 라그비츠, 하거, 호네커 등 정권 최고 권력층에 속한 개인들-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협의가 작가의 머릿속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결국 검열은 출판총국의 전문가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출판 체계 전반에 고루 퍼져 있었던 것이다. 검열에는 이념적인 부분뿐 아니라 미학적인 부분까지 고려하는 협의 과정이 수반되었다. 그리고 모든 이가-작가와 편집자뿐 아니라 관료와 기관원까지-이러한 검열을 한 원고가 한 권의 책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