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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소라빵의 서재
  • 영의 자리
  • 고민실
  • 12,600원 (10%700)
  • 2022-04-13
  • : 175



가끔 그럴 때 있지 않나, 서글픔과 패배감이 넘실거리며 찾아오는 날. 근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우울한 기운을 떨쳐내고 싶지는 않은 날. 축축 처지는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다가 오히려 기분이 나아지기도 하는 날. 이것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하나?😂


나도 <영의 자리>를 읽으며 이런 느낌을 받아서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하나 만들었다. 비가 내리고 바다가 밀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소설을 읽어보길 바란다. (아래 링크는 멜론으로 연결됨🎧)


http://kko.to/w-7A-h8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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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는 서른 살 백수 '양'이 영등포 플라워약국의 알바생으로 들어가며 겪는 일을 그려낸 소설이다. 90년대생, 케이-팝 고인물, 케이-도터, 취준생이라면 특히 이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 것이다.


이 소설에는 눅눅한 기운이 서려있다. 양이 대여섯 살 무렵 경험한 바다에서 느낀 묘한 감정이 서른 살까지도 따라다닌다. 썰물 때 바다에 발을 담가보려고 했던 어린아이가 다시 해변으로 돌아오기까지 느꼈을 두려움과 막막함, 왠지 허망하고 지쳐버린 마음.


사실 책을 펼치기 전에는 이런 음울한 이야기를 읽어도 되나? 나도 취준생이라 너무 몰입해서 더 우울해지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읽다보니 기우였음을 알게 됐다. 양이 소설 초반에 약국 업무를 배우고 정신없이 살다가 조와 썸^_^(근데 약간 쌈 같기도...)타는 걸 따라가는 게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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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워약국의 김 약사는 양을 '유령'이라고 부른다. 같이 일하는 조에게도 유령이라 하고, 손님들 중에도 유령이 있다고 말한다. 김약사가 비록 양과 조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답정너를 일삼긴 해도^_^;; 『영의 자리』에서 유령은 주제와 존재를 관통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218쪽)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김 약사는 자기 자리를 잃고 생기를 잃은 사람들을 유령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유령이라고 부르는 건 나약함을 포착했다는 증거다.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람들. 알맹이가 죽어버린 채 사는 사람들. 양은 플라워약국에 진입하며 유령이라는 지위를 얻고 플라워약국을 나오며 김 약사가 씌운 유령의 껍질을 벗는다. 그리고 완전한 영으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영(0)은 혼자서는 일하지 못해도 다른 숫자에 기댈 때 굉장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유령의 시기를 거쳐왔으며, 유령이며, 앞으로 유령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유령이라고 불러도 영이라는 걸 잊지 말자. 지금은 텅 빈 마음뿐이어도 다시 자리를 찾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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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와 더불어 특히 눈이 더 오래가는 페이지들이 있었다. 양이 혜의 집에서 본 것들(129쪽)과 양의 집(203쪽)을 묘사한 문장은 내레이션 없이 카메라의 시선으로 그대로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양이 느낀 기분과 변화를 충분히 전달한다. 양은 혜를 동경했지만 혜의 집에 다녀온 뒤로 점점 멀어진다. 나중에 자기 집에서 비슷한 풍경을 포착하고 나서는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양이 유령의 삶을 피하지 않고 나아갈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129쪽) 도어록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났다. 현관에 재활용 쓰레기가 아무렇게 쌓여 있었고 주위에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그릇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스타킹이 머리카락 뭉치와 뒤엉켜 있었다. 쓰러져 있는 빈 술병에도 먼지가 앉았다. 싱크대에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이 보였다.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화장품이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몇 개는 뚜껑을 열어놓아 내용물이 말라붙었다. 혜를 부축해서 침대로 데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을 피해 눕혀주었다. 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현관으로 돌아가 발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비벼서 떨어뜨리고 신발을 신었다. 왠지 울적해져서 문에 한참 기대서 있었다.


🔖(204쪽) 나는 에휴, 한숨을 쉬고(...) 입고 있는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 에코백과 함께 세탁기에 집어넣은 다음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듬뿍 넣고 작동시켰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발바닥에 붙은 머리카락과 먼지 덩어리를 떼어내며 매트리스에 누웠다.



※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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