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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너머
  • 경애의 마음
  • 김금희
  • 16,200원 (10%↓900)
  • 2018-06-15
  • : 8,624

'외롭다’ 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 동사다. 텅 비어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낱말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한다. 그 말에는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이미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동사로 바꿔 놓는다. 김소연, <마음사전> 中

 

<경애의 마음> 은 외로움에 관한 소설이다. 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진다. 김소연은 외롭다는 상태에 동작성을 부여한다. 맞다. 이 소설의 상수와 경애는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움직여대는 어떤 에너지로 이런 저런 행동을 하게 된다.
    
예술에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직접 토로하는 것은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그러므로 손쉽게 외롭다와 같은 말을 쓰는 작품을 보면 심드렁해지곤 만다.
 
하지만 김금희는 정면돌파를 감행한다. 소설 곳곳에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제목부터 경애의 마음 아닌가. 소설에서 어떤 '마음'을 다루겠다는 생각.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아 이 작가는 이 어려운 것을 해냈구나.  하고 내 마음에 미동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지는 삶에 있어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이 없는 삶은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p. 33
 
그렇게 접히고 축소된 이야기 속에서 언니들의 내부에 일었을 소란을 증폭해서 읽는 것, 그것이 상수가 자신의 특장인 ‘여지’에 대한 감각과 상상력을 십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싸이월드에  ‘틈’ 이라는 제목의 일기를 적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틈'이 없는 삶은 견딜 수 없었다 뭐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이때의 틈은 어떤 여유, 시간, 거리 등등이었겠지만 상수에게 '여지'는 타인의 마음 속의 소용돌이를 공감하는 상상력의 공간으로서의 여지이다. 나의 '틈'은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상수의 '여지'는 타인에게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p.24~25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p. 55
경애는 그런 마음에 대해서 꽤 잘 잘았다. 그러니까 현실의 효용가치로 본다면 애저녁에 버렸어야 하는 물건들을 단지 마음의 부피를 채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말이다.
 
p. 64
 
남자아이의 뒷모습만을 찍은, E가 만든 ‘마음’ 이라는 제목의 영화.
 
P.65
 

“거기에는 내 마음이 다 담겨 있어”

     

     
 
    

언니는 거기 나오는 유령은 사실 사라진 연이이라기보다는 그냥 실연 이후의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밤 당한 노상강도처럼 연애는 참 황망하게 끝이 나버리고 하잖아. 그러고 난 뒤로도 유령처럼 우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그런 마음은 ‘마음’이니까 전지전능하게도 온갖 방법을 이용해서 곁을 떠돌고 늘 우리의 대기에 숨어 있지.

 
P.137
 
그런 이기적인 누군가의 착취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다니, 그런 관계 속으로 자기를 몰고 들어가는 건 죄악에 가까운 일이야! 상수는 그래서 그 새벽에 자기도 모르게 경애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는데 그 사이 잠이 든 경애가 여보세요, 가 아니라 아 좀, 누구야, 하고 퉁명스럽게 받는 바람에, 경애씨, 제가 잘못 걸었습니다, 더 자요, 미안해요, 하고 끊고 말았다.
     

 “마음이 쓰(이)다.” 라는 표현. 다른 맥락에서였다면 난 이 뻔한 문구를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구 앞에서 잠시 책장에서 눈을 떼고 내 마음을 바라보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때 분명, 내 마음에 바람이 불어와서 살짝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합리를 내세워 현실의 효용가치가 없는 마음은 버리기 시작했다. 해결될 수 없는 일에, 걱정해봐야 소용없는 일에 마음을 쓰는 일은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20대 중반의 큰 깨달음(?) 뒤에 점점 그런 마음들을 버리자고 최면을 걸고 살고 있고, 지난 10여년의 트레이닝 결과 지금, 어느 정도는 그 과정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마음 써봐야 대세에 지장이 없으면 굳이 헛수고를 하지 말자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람이니까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그 헛수고를 하며 살자고 말하는 소설이다. 그 헛수고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유이지 않냐고 말하는 소설. 이 너무도 익숙한, 도덕교과서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뻔하지 않게 섬세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에게 있던 여러 마음의 감각들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 결국은 마음이지.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이지. 나는 (남자가 되어서)왜 이렇게 마음이 여린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내 작은 마음들 앞에서 한탄했던 내 어릴적 그때로 돌아가고 말았다.
 
얼마 전 읽은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자살없이 오늘을 사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 했다. 경애의 마음에서 김금희는 이 쿨한 무감각의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감각하고,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그 호소에 기꺼이 응답할 생각이다. 카뮈와 김금희의 두 태도를 경애(敬愛)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실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이 다짐을 – 이 소중한 순간을 - 꽤나 오랜만에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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