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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hseo0920님의 서재
  • 자음과모음 2024.겨울
  • 자음과모음 편집부
  • 17,100원 (5%540)
  • 2024-12-01
  • : 506



『자음과 모음』 63호에서는 '동료'라는 큰 틀 안에서 여러 문학인의 '동료'에 대한 다채로운 사유를 보여준다.

특히 지난 10월에는 문학계 종사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에 기뻐하며,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다.

본지의 '동료'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기쁨의 연결감에서 시작된다.


'한국문학'이라는 항으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머리말 中


본지에선 공동체나 집단적 행위성은 한국문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언급한다.

나는 이 대목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은 잊혀선 안 될 사건과 억압된 아픔의 목소리를 증언하고,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시절의 시련에 대해 다루기도 하며, 살면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을 어루만지며 잠시 쉬어갈 곳을 기꺼이 내어주기도 한다.

이런 과정 속 문학에서 동료는 창작이나 감상, 비평, 정치적 행위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존재 혹은 애착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분노를 일으키거나 상처를 주고받고야 마는 실체이기도 하다. (머리말 8p 인용)

하지만 본지는 여기서 더 깊숙이 들어가 문학계 행위자들의 연결됨이 현 문학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대안적 가능성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던진다.

이와 관련해서 김영찬 외 네 명의 필진이 각기 다른 분석을 통해 흥미로운 사실들을 조명하여 읽는 이들로 하여금 문학 읽기와 말하기 시야를 넓힌다.

외에도 자음과모음 63호에는 한국문학의 흐름을 담은 흥미로운 읽을거리로 가득 찼다.

"네오픽션상" 수상자 발표 소식과 귀한 심사평이 실린 지면, 계간지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시와 소설들, 훌륭한 시와 소설들을 다방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리뷰 지면.

그리고 작아진 한국문학 시장의 흐름에 변화의 문을 열고,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르는 데 큰 기여를 한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 관련 특별기고 지면은 앞으로 더 커질 문학의 한국문학의 영향력에 기대를 더하게 만든다.

평소에는 쉽게 접하기 부담스러운 비평도 한 권으로 묶인 계간지로 받아 보면 왠지 모르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인류세 시대'로 자리 잡은 현재 상황에 문학장은 질문을 던지며, '신체 감각'을 주요 키워드로 두고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평론가들의 글은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문학이 확장돼 가는 가능성을 더욱 선명하고 섬세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곤 해당 계간지를 읽는,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함께 계속해서 새로운 문학의 장을 열어가자며 손을 내밀어 주는 듯한 기분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계간지 만큼이나 문학의 트렌드를 한눈에 살펴볼 만한 건 없다고 본다.

문학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문학과 삶을 동반하고자 하는 길을 택한 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함께 있을 수 있는 각각의 이유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자라면 타인의 글과 상호작용은 필수적이다.

예술가는 물론이고 비평가, 단체에 소속되어 목소리를 내는 자, 교육자 등 모두 타인의 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료'를 사유하고 인식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특히, 공통적으로 '불확실한 형태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 서로 귀속되지 않은 채 함께 있는 상태에서 동료의 양상을 띤다고 한 최가은 평론가의 글이 인상적이다.

실제 하지 않는 무언가의 상태.

어떠한 개인의 속성도, 집단의 속성도 가지지 않은 채 같은 장소에서 자리 잡았다가, 흩어지고 남아있는 무언가(잔여)를 통해 우리가 맞닿았다는 걸 주장할 수 있는 것.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했다는 것만으로 '불확실한 형태'의 징표가 될 수 있는 것.

고백하자면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지만, 늘 '찬사 받는 문학 작품'의 특유성을 골몰하는 나에게 깊게 와닿은 지면이었다.

'불확실한 형태의 계시'를 내리는 사회에서 문학인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존재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학계 종사자라면 평생이 될 수 있는 시간을 들여 골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쉼 없이 변형되고 일방향을 추구하지 않는 만큼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필자 다섯 명이 펼치는 동료의 사유는 '동료'라는 명사 안에서 문학이 작동하는 방식의 일부분을 비춤과 동시에 현재 한국문학의 흐름에 간접적인 대안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우리를 이어주는 여러 가지 요소들


63호의 큰 틀이 "동료"라 그런지 실린 단편소설을 읽을 때도 해당 인물들의 동료감 의식하면서 읽게 된 것 같다.

각 다섯 편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동료감은 모두 다르다.

단편소설의 첫 번째 장에 실린 권여선 작가의 「일주一周」에서는 신숙과 그녀의 어머니 유재, 그녀의 딸들 혜영과 혜진, 그리고 신숙의 간병사 이들의 묘한 관계가 주는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병원을 배경으로 그 묘한 관계 속에서 떠다니는 원망과 측은지심,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느끼는 친밀감.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감에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키며, 마지막 페이지에 오래 머무르게 만든다.

자신들의 장소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하진 작가의 「발로 發露」는 투쟁하는 자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매력적인 작품이다.

소설 속 배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니지만, 인물들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에서 우리가 발굴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해당 소설을 읽은 자라면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소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청예, 「여름을 기다렸던 돛들을 위해」

이상주의를 생각하게 되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단편이었다.

속물이 배제된 마음으로 이어진 동료의 형태가 이런 게 아닐까.

순수함의 형태를 보여주는 듯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비록 현실감은 부족할지라도 이런 유의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 시켜주는 데에, 혹은 묻혀있던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끌어올려 주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고 믿게 된다.


끊임없이 이어질 문학의 새로운 시도


문학이 계속해서 새로운 가치를 발굴해 내며, 수용하고, 추구하기 전의 분석을 촘촘하게 볼 수 있었던 성현아 평론가의 글도 굉장히 흡입력 있었다.

그녀는 인류세 (인간이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만들어진 새로운 지대)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차원적으로 인식되었던 비인간적인 것들의 시선을 비틀어 새로운 인식을 제시함과 동시에 "신유물론적 관점"으로 소설들을 분석한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인간이 모든걸 지배하고 있다고 인지하지만, 그들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비인간적인 것들에게 흡수되기도 한다.

누가 지배자의 위치를 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중 그녀가 이것을 현호정 작가의 『단명 소녀 투쟁기』를 예시로 설명한 대목이 인상 깊다.

근대적 개인이 타자의 의지나 영향으로 자유로운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자신의 의지와 내면을 공유하는 '분신'을 적으로 간주한 것과는 다른, '온전한 신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신체의 부분' 또는 '신체의 기관'으로만 축소할 수도 없는 모순적 신체 형상을 제시하는 것. (본문 인용)

신체기관의 독립성을 (외에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학인들의 시도들이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소설에서 어떤 개성적인 형태로 나타날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오혜진 평론가의 글에서는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두 작품을 분석하며, 재현 문학의 의의를 말한다.

앞의 성현아 평론가와 같이 '신체'라는 주요 키워드를 사용했지만, 한강 작가의 글에서 나타는 '신체'는 감각기능으로서의 신체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실제로 한강 작가의 두 작품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신체적 감각 묘사가 매우 생생하다.

한강 작가의 작품에서는 인용해온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읽는 이들로부터 하여금 "정동"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해당 사건과 연루되는 감각을 갖게 만들기 위함일 테다.

신체적 감각은 누구에게나 가장 취약하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건 부정 못하는 사실이니 말이다.

나아가 국민들을 서사화하여 "역사의 현재화"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같은 역사를 답습하지 않기 위한 의도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녀의 비평은 한강 작가의 위여한 작품성을 한번 더 몸소 느끼게 하고,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의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이 글은 꼭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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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계간지는 이번 63호로 처음 접해본다.

처음이라서 자음과모음 계간지로 문학계 안에서 마무리하는 2024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크고 작은 이슈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문학인으로서 해야하는 몫에 대해 다시금 머릿속에 새기고,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나를 가꿔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63호에서 다양한 형상의 "동료"를 생각하며, 우리는 어떻게든 영향을 받으면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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