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도인가, 32도가 넘는 폭염에 문래동에 한 공방을 인터뷰 했었다. 편집자 수업을 들으며 책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그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꽤 뜨거웠던 스물 일곱 해였다. 심지어 연차도 내고 갔던 터라 오전 인터뷰만 마치고 집에 가기는 조금 아쉬워 안국으로 넘어갔다. 그 미친 더위에 안국, 삼청동, 광화문을 걸었다.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 첫 호안 미로 특별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 미술 전시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주말에는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전시회였는데 평일 낮시간에는 운이 좋게 줄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호안 미로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갔던 전시회였다. 작품들은 기이하고 추상적이었다. 그의 작품을 ‘경계를 부순 표현력의 자유’라고들 이야기 하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호안 미로의 전시가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무제’라는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바르셀로나 여행을 하며 호안 미로 미술관을 찾아갈 정도로 그가 인상 깊었던 거다) “그림 제목이 왜 거의 다 무제야..” 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는데 그건 꽤 호안 미로스러운 이유가 있었다. 제목으로 정해진 시선보다 추상 작품을 순수와 상상력으로 관객과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인간은 모든 것들에 이유를 찾기 마련이다. 그 이유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굉장히 아무것도 아닌 데다가 쓸데없이 길기도 하지만. ‘관심사’라는 것에 대한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이 정도면 굉장히 평범한 거 아닐까) 30대에 들어서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삶을 철학적(인문학적)으로 바라보고 그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처럼. <세상 인문학적인 미술사>가 나처럼 비슷한 관심사의 흐름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미술, 재미있어. 근데 무슨 시대가 이렇게 많아? 그래서 그 시대에 무슨 작품이 있었는데?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우리가 아는 그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라는 질문을 가득 품고 있다면 더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미술만 다루는 게 아니라 역사도, 철학도 있다. 미술사 버전의 지대넓얕 같은 느낌이랄까.
“인문학이니 인과관계니 하는 바람에 무슨 거창한 이론 따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저 오늘 점심 가스레인지 불 위에 물이 담긴 냄비를 올렸기 때문(원인)에 맛있는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결과)는 이야기이고, 어제 이른 아침 세탁기를 돌렸기 때문(원인)에 오늘도 보송보송 잘 마른 수건을 쓸 수 있었다(결과)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_프롤로그 중에서
저자의 서문이 인상깊고 좋았다. 인문학이니 삶이니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한 말이. 삶을 굉장히 대단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제법 위로, 그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크고 막연하고 무섭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평범하고 소박하고 보통의 삶으로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말 같아서.
인문학이니 인과관계니 하는 바람에 무슨 거창한 이론 따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저 오늘 점심 가스레인지 불 위에 물이 담긴 냄비를 올렸기 때문(원인)에 맛있는 라면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결과)는 이야기이고, 어제 이른 아침 세탁기를 돌렸기 때문(원인)에 오늘도 보송보송 잘 마른 수건을 쓸 수 있었다(결과)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P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