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간 서양 민주주의의 정치 지도자들은 16세기 아스테카인들을 그대로 빼다 박은 태도로 첨단 기술의 정복자들을 대했다. 그들은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인공 지능의 천둥 벼락 앞에서 요정의 가루가 자기들에게도 다소나마 떨어지기를 바라며 납작 엎드렸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책의 저자 줄리아노 다 엠폴리는 정치평론가이자 소설가로 1973년 프랑스에서 출생해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피엔차로마대학교에서 법학을, 파리정치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市의 문화 부시장으로 활동하다 마테오 렌치 총리 재임 시절 수석 고문으로 발탁되어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22년에 발표한 첫 소설 <크렘린의 마법사>는 평단을 주목을 받아 단숨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 콩쿠르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새로운 것은 너무 새로워서, 우리는 그걸 뭐라 부를지조차 모른다. 그들 중 일부를 가리키는, 그나마도 본질을 정확히 짚는 대신 명명자의 감정이나 소망이 담긴 단어들을 나열하자면 이러하다. 극우 포퓰리즘, 선출 독재, 스트롱맨, 암흑 계몽주의, 빅테크, 기술 권력, 테크노 봉건 영주, 브롤리가키 등등. 새것은 이 모든 것을 다 합한 것 그 이상이다.
그 新 세력들은 2010년대 초엽까지도 변방의 괴짜들로 보였다. 정치권에서 나타난 새로운 세력들은 지성과 인성이 모자란 무식쟁이 낙오자들로 보였다. 실리콘밸리에서 등장한 새로운 세력들은 사회성과 감수성이 모자란 지질한 너드들로 보였다. 양쪽 다 상식 밖의 존재들이었고, 너무 괴상해서 심각한 위협이라기보다는 웃음거리로 보였다.
낡은 질서는 무식쟁이 낙오자들과 지질한 너드들이 선을 넘으면 언제든지 자신들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이 자정작용自淨作用이라는 신비한 면역 시스템을 지닌 건강한 양복 신사이고, 상대는 매년 왔다가 지나가는 감기 같은 존재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지금, 낡은 질서는 정체 모를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 신세다. 우리가 그 바이러스에 명명할 이름도 붙이지 못한 사이, 새것은 낡은것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신세계의 침략자들은 더 이상 우스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꿈꾸는 신세계는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이에 저자 다 엠폴리는 500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 아스테카 제국에 스페인 침략자들이 도착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고 한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상륙 소식이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을 때 모테쿠소마 2세는 이방인들이 초능력이 있는 듯하다는 보고를 받은 탓에 혹시 야만인이 아닌 신들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굴욕을 무릅쓰고라도 전쟁을 피하려 선물을 챙겨 이방인들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 굴욕과 전쟁을 모두 겪고 말았다.
지난 30여 년간 서양 민주주의의 정치 지도자들은 16세기 아스테카인들을 빼다 박은 태도로 첨단 기술의 정복자들을 대했다. 모테쿠소마 황제가 납작 엎드린 것처럼 고분고분함만으로는 위정자爲政者들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들은 어느새 열등한 위치에 서 있었고, 정복자들은 그네들의 제국을 서서히 밀고 들어왔다. 그렇다. 지금은 '포식자들의 시간'이다.
다 엠폴리는 신세계 침략자들을 마키아벨리 시대의 냉혹한 군주 체사레 보르자에 빗대 '보르자형 인간'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왜 안 된다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타인들의 눈엔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일으킨다. 리츠칼튼 호텔에서 물고문을 곁들인 궁중 암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메시아 신드롬과 아스퍼거 증후군을 함께 앓은 듯한 부자가 범죄, 이민, 물가 같은 문제의 해법을 내놓기도 한다.
트럼프의 귀환

트럼프 당선 다음 날, 부켈레는 X에 "당신들이 어제부로 시작된 인류 문명의 분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것만은 확신한다"라는 글을 올렸다. 한 달 전, 대선 후보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주 이리를 방문해 청소넌 범죄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우리가 단 하루라도 정말 독하게 나간다면, 한 시간만 난폭하게 밀고 나간다면,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모든 것이 멈추겠지요"라고 말이다.
8년 전과 다른 점은 옛 질서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브렉시트 찬성파, 도널드 트럼프, 전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상부 권력에 맞서 싸우는 반란군이 으례 그러듯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혼돈을 전략적으로 채택하는 주변인 무리처럼 보일 수 있었다.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다. 혼돈은 반란자들의 무기가 아니라 지베자들의 표식이다.
보르자형 인간들은 격동기에 특히 잘 적응하는 생명체다. 그러한 시기에 정치 체계는 자체적 한계에 부딪히고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응할 방법은 속도와 힘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포식자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정상으로의 회귀에 가깝다. 오히려 피비린내 나는 권력 추구를 어떤 규칙 체계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짧은 시기를 예외로 보아야 한다.(102쪽)
테크 포식자들의 시대

실제로 테크 거물들은 보르자형 인간이 맞다. 트럼프의 재선은 이러한 시각에서도 중대한 전환점이다. 이제 테크 정복자들이 사상 처음으로 기존 엘리트들과의 전쟁을 선포해도 될 만큼 힘을 키웠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테크 거물들은 다보스 블록의 지배적 위상에 감히 대놓고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르자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숨겨 왔다. 오랫동안 그들은 외교적 수완을 보여 주면서 사자보다는 여우에 가깝게 처신해야 했다.
포식자들의 시대에 전 세계의 보르자형 인간들은 자기가 지배하는 영토를 디지털 정복자들에게 실험실로 내어 주고 있다. 그들이 구시대의 법과 권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대한 그들의 비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은 스마트 도시를 건설 중이고, 엘살바도르의 부켈레는 비트코인을 자국의 공식 화폐로 채택했으며, 아르헨티나의 밀레이는 AI 서버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검토 중이다. 트럼프 또한 행정부의 주요 영역 전체를 실리콘밸리의 가속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그들의 주도하에 세계는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포스트 휴먼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영토들의 조각보가 되어 간다.
AI, 새로운 권력의 출현

AI는 단순히 권력의 기폭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기계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다. 자동화는 수단에 관한 것이지만 AI는 목적에 관여한다. AI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믿어 왔던 역량을 계발한다. AI가 미래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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