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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를 궁리한 조선의 선비들
  • 곽재식
  • 19,800원 (10%1,100)
  • 2025-12-30
  • : 720

이 책에 실린 일곱 명의 선비들의 이야기 속에서 경제와 돈에 관한 여러 주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자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해서 조금 더 가깝고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옛 사연을 통해, 오래 고민되어 온 경제와 현실의 문제들을 각자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곽재식은 숭실사이버대학교 환경안전공학과 교수이자 SF 소설가로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과학 지식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필진과 패널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다수의 저서들과 소설들을 출간, 발표했다. 


총 일곱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혁신의 설계자 정도전, 유동성 개혁론자 하륜, 인간 심리로 부를 해석한 철학자 이지함, 노비해방 사상의 선구자 유형원, 경제 규모혁신의 설계자 유수원, 실용주의 추구한 개혁 이런가 박제가, 과학기술의 거인 정약용 등을 통해 그들의 고민을 살펴볼 수 있다.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말 조정에서 정치가로 활동하다 귀양살이를 거쳐 후학을 양성하다가 조선 창업에 올인했던 실질적인 조선 설계자였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조선 건국 무렵에 <경제문감經濟文鑑>, <경국전經國典>이란 책을 썼다. 당시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로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책'이란 뜻을 지닌 <경국전>에 경제와 돈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많이 실려 있었다.       


즉, 그는 <경국전>의 ‘경리經理’ 항목에서 고려 말의 겸병兼倂 문제를 다루었다. 겸병이란 남의 땅을 합쳐 가지는 것이다. 즉 세력이 강한 사람이 땅을 겸병해 차지하는 문제가 너무 심각해지다 보니, 땅 부자는 땅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더 많은 땅을 사들여 더욱 부유해지고 부자에게 땅을 조금씩 팔아 치우는 빈자貧者는 더욱 가난해지는 이를테면 고려 말의 '부익부 빈인빈' 현상을 지적했다. 


(사진, 경국전)


또한 경작할 땅이 없어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땅 주인에게 추수한 곡식의 절반을 줘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굉장히 심각한 수준임을 서술했다. 그 외에도 정도전은 땅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일으키는 두 가지 문제를 추가로 지적했다. 


첫째로 당시의 토지 제도가 복잡했기 때문에 땅에 대한 여러 복잡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조선 초 토지 제도는 '수조권을 나눠준다'라고 명시했기에 말하자면 땅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곡식을 추수했을 때 누구에게 얼마씩 분배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경국전>에서 정도전은 땅 하나에 주인이 7~8명이나 되어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권력자들이 땅을 독점하면 이로써 더 큰 이익을 억으려 부당한 압박을 가하고 나라의 제도를 좌지우지하며 정부와 결탁해서 판결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조종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코자 정도전은 '땅의 국유화'라는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다. 


나라가 주인들로부터 땅을 거두어 새 법령에 따라 농사지을 땅을 백성들에게 다시 나눠준다는 발상은 성공했을까? 피 튀기는 혁명은 부메랑을 맞기 쉽다. 정도전이 말년에 남긴 시 한편(제목 '스스로를 비웃다')을 소개한다. 


(사진, 정도전 시)      


하륜


이성계의 조선 창업 최측근이 정도전이었다면 이방원의 최측근은 하륜이었다. 정도전과는 동문수학 친구였기에 조선 창업에도 참여했지만 나중에 원수 사이가 되고 만다. 관상에 관심이 많았던 하륜은 고려 말의 '영흥군 사건'(1389년)에 얽혀들었다. 영흥군 왕환은 고려 임금의 팔촌쯤 되는 인물로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신돈과 관련된 사건에 휘말려 무릉도로 추방되어 귀양살이하던 그는 한동안 실종된 인물로 여겨졌다. 
이후 19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본인이 왕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로는 어쩌다 보니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며 세월이 흐르는 사이 한국말도 잘하지 못하게 되었고 과거의 기억도 많이 잊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의 외모가 달라져서 다른 사람으로 보였기에 진위 여부가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관상에 특기를 지닌 하륜과 동료들은 '가짜 왕환'이라고 주장했으나 반면 왕환의 부인은 진짜라고 주장함에 따라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이성계가 나서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성계 인맥에 포함될 수 있었던 셈이다. 
정도전이 불도저 스타일의 개혁가였다면 하륜은 유연하게 대처하는 꾀돌이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방원에 줄을 대기 위해 장인인 민제 대감에게 사위인 방원이 왕이 될 관상을 지녔다고 넌짓이 말하자 이 말이 방원에 귀에 들어가게 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이후 이방원이 국가 운영을 장악하자 하륜은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최고의사 결정 조직인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대신 '의정부'를 만들었다. 이처럼 정도전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 조선 제도들 중엔 하륜의 수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경우가 많았다.      
1401년 '종이로 돈을 만들어 통용하자'는 하륜의 의견은 정부 정책으로 추진되어 지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용어는 ‘저화楮貨’로, 중국에서 사용했던 교초와는 조금 다르다. 저화에서 ‘저’는 닥나무를 뜻하는데, 조선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로 쓰던 나무다. 그러므로 저화는 지금 쓰는 ‘지폐’라는 말과 거의 동일한 느낌을 준다.


(사진, 조지서 터)
<조선왕조실록> 1415년 음력 7월 25일의 기록을 보면, 지폐를 만드는 기관은 ‘조지서造紙署’였다.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에 가 보면 조지서 터 비석이 있다. 그 근처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돈을 찍어 낸 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지함
우리들 대부분은 이지함을 대하면 맨 먼저 '토정비결'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를 만든 이는 이지함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이지함의 인생은 불운과 고난, 빈곤과 실패로 가득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는 좋은 집안의 차남으로 출생(1517년)한 충청도 사람이며, 좋은 가문으로 장가갔지만 말이다. 
이지함은 상업의 장점을 깨달았다. 그것도 먹고살고자 온몸으로 바닥부터 굴러가며 알아냈다. 그는 노 젓는 일부터 시작해 품삯을 벌고자 땀을 흘리는 와중에 밀물과 썰물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게 절박하게 고민한 덕택에 그는 항해와 상업의 달인이 될 수 있었고, 큰 장사로 많은 재물을 벌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의 부모님 묘지가 바닷가에 있어서 여차하면 물에 잠길 것 같아 둑을 쌓아 바닷물을 막으려고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비록 바닷물로부터 부모님의 무덤을 완전히 지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효성에 감동해 하늘이 이지함에게 평생 소중하게 활용할 지식인 밀물과 썰물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줬다고 짐작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조선 선비들
이밖에도 유형원의 <반계수록>, 유수원의 <우서迂書>, 박제가의 <북학의>, 정약용의 <경세유표> 등에 실린 이야기를 통해 학자들의 고민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유수원은 스스로의 탐구와 직관으로 중상주의 상업이론을 책에 담고 있다. 특히, 같은 중상주의 실학자인 박제가의 '이사이망以奢而亡 이검이쇠以儉而衰'(사치로써 망하고, 검소로써 쇠약해진다)는 주장은 마치 과거 미국 경제가 '소비는 미덕이다'란 캠페인을 벌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 이슈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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