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비투스를 가정환경 내에서 부모에게 체득하고 몸에 배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르게 말한다. 꼭 혈육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좋은 스승, 우연한 만남, 한 권의 책도 충분히 나를 키울 수 있는 상속이 될 수 있다. 케데헌(K-POP 데몬헌터스)의 초대박 이후, 백화점 앞이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라. 상속자본에 굶주리고 그 맛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모두 귀담아 들을 만하다. 부모복에 유독 얽매여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런 유산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 '추천의 말' 중에서

책의 저자 임하연은 유학파 출판 기획자이자 인문학 작가다. 십데 시절부터 동경해온 인물이 재클린 케네디였는데, 왕족의 기품과 서민의 태도가 공존했고 세련된 교양과 품격으로 세계인을 매혹시켰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엔 런던 소더비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아트컬렉터 교육을 받아 문화와 교양에 관심이 많다.
대화체로 쓰인 이 책은 다섯 개 파트로 구성되어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초리한 곳에서 태어난다, 운명은 오래된 설계도를 품고 있다, 시간이 만든 무게와 나만의 서사,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창조하는 안목, 세상에 남기는 비밀스러운 파문 등의 이야기를 통해 고유함, 탁월함, 역사와 스토리, 심미안, 영향력 등 다섯 가지 주제에 관해 학생과 상속자를 등장시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간다. 책 속 인상적인 귀절을 소개하려 한다.
고유함(사치스러운 초연함이 담긴 정신)
학생: 맞아요. 좋은 인상은 아니었어요. 확실히 상속은 부의 대물림을 고착화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비관적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죠. 부모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는 건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행운이잖아요.
상속자: 그러나 ‘상속자 정신’은 부모로부터만 오는 상속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뛰어넘어 사회로부터 받는 더 넓고 큰 상속을 뜻하죠.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죠? 답은 상속자 정신입니다. 상속자 정신은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거든요.
탁월함(선을 긋는 마음은 품격을 잃는다)
학생: 하지만 아름답게 포장하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왜곡한다면 자기 위로밖에 안 되는걸요.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요.
상속자: 이것은 미학적인 문제라기보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견뎌내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나죠. 낙관적인 감성을 길러 나가는 것도, 상상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포함돼요. 우리는 낭만적인 해석을 통해 영웅이 되기도, 비관적인 해석을 통해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역사와 스토리(운명을 다시 쓰는 손끝)
학생: 선생님은 처음부터 상속자 정신을 운운하면서 앎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지만,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박탈감에 시달리는 거라고요. 알아 버리고 나니 수저계급론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었죠.
상속자: 그렇지 않아요. 타고난 운명의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느냐 생각해 보면 달라지겠죠. 수저계급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관계를 권력관계로 볼 수밖에 없어요. 나보다 재산을 더 물려받은 사람, 덜 물려받은 사람 오로지 두 가지로 나뉘죠. 하지만 인간은 사랑 할 때만큼은 동등해요. 인간관계를 내가 먼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세상이 달라지죠. 그녀와 나 사이에는 분명 격차가 있었지만,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영혼만큼은 동등했어요. ‘그녀도 나와 같은 영혼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타고난 운명의 열쇠를 내가 쥐게 되죠.
학생: 정말 그런 거예요?
심미안(아름다움의 계보를 잇는 이야기)
재클린은 결혼하자마자 집 근처 조지타운 대학에서 미국사 수업을 들었다. 원래부터 미국의 역사에 관심이 없었지만 남편 케네디가 어엿한 상원의원이 되었으니 대학원에서 정치학과 미국사를 배웠다. 이때 다독가였던 케네디는 속독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조지타운 외교학부 남학생들은 상원의원 부인이 같은 수업을 듣는 것에 반발했다. 이런 반응 때문에 재클린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케네디 부부는 주말마다 재클린이 배운 걸 직접 구경하려고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학생: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상속자: 끝없는 대화는 사랑을 몰랐던 케네디가 사랑을 알게 된 순간이었어요. 같이 읽고, 그림을 그리고, 산책하고 재클린에게는 대화의 소재가 풍부했죠. 두 사람은 완벽한 타인이지만 책과 역사에서 발견한 자신을 구원한 영웅을 공유했고, 세상을 증오하기보다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학생: 서로를 구원한 아름다운 쌍방 구원 서사군요....
영향력(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상속의 본질)
학생: 상상의 친족도 괜찮다고요? 소설 속 등장인물을 가족으로 여겨도 되나요?
상속자: 상상력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습니다. 가상의 친족이 실제 혈육보다 위로를 주기도 해요. 그것이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기도 하죠. 가상의 친족이 남긴 유산은 무한대로 펼쳐집니다. 물려받을 수 있는 인원이 셀 수 없이 많아지죠.
인간명품이란
책은 비록 명품이라 불리는 물건을 걸치지 않아도 나 자체가 명품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아직도 수저 타령이나 하면서 미래의 불안함을 오직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사회와 가난한 부모 탓으로 돌리려는 젊은 청춘들에게 외적 조건 대신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라는 깨달음을 선물하는 철학서와 같다. 명품으로 태어나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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