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일에 살면서 이 사회가 참으로 민주적이고, 사람들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자주 느꼈다. 그럴 때마다 이곳이 정말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출현했던 나라가 맞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때의 의아함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관한 내 관심의 출발점이었다. -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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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김종천은 문명평론가로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경제학학사와 석사 과정을,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민주주의 흥망의 역사를 걷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탐방>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독일에서 살 적에 당시 대중매체나 역사적 사료 및 서적 등을 통해 나치 정권 출현의 사회적 배경과 나치 통치 시대의 실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독일인의 태도에 감명받았다고 밝힌다. 귀국 후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자주 받았던 질문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관한 것이어서 이에 소설이란 장르로 이를 전하고 있다.
뮌헨 거사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지휘하는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하여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이는 1922년 10월 29일자 <뮌헨인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이다. 민족사회민주당 중앙당 당사에서 콧수염을 한 한 사내의 손에 들린 신문이었다. 이 사내는 당원으로부터 ‘지도자’로 추앙받으며 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꿈을 꾸는 히틀러였다.
패전국 독일이 승전국 프랑스에 전쟁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음에 따라 프랑스군은 독일의 북서부에 위치한 공업 중심지인 루르지방을 침입하자 독일 정부는 점령군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정도의 지침을 내렸다. 이같은 소극적 태도에 뿔이 난 독일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프랑스군은 즉각 퇴각하라’는 시위를 펼쳤다.
이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던 3월 말 프랑스군이 에센에서 발포하는 일이 발생, 13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생김에 따라 독일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에 히틀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원들을 동원해 집회를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바이에른 경찰청장의 집회 금지 선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히틀러는 ‘원하면 발포하라’는 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는 중도파와 대학생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나치의 정치적 존재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이여 깨어나라’는 히틀러의 연설 주제는 청중들을 흥분으로 몰고가며 큰 함성을 불러일으켰다. 시종일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와 프랑스에 대한 증오로 청중들을 이끌었다. 청중들은 마법에 걸린 듯 열광했다. 덩달아 민족사회주의당과 히틀러의 명성은 하늘로 치솟았다.
1923년 9월 공화국 정부는 프랑스에 굴복해 전쟁배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한지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았다. 출범 4년 만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대 위기를 맞은 셈이다.
뮌헨 시가지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지켜보던 히틀러의 눈이 반짝였다. 그날 밤 피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히틀러는 공화국 사냥에 나섰다. “무능하고 나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라져야 합니다”란 그의 말에 청중들은 적극 환호했다. 이후 연속되는 대중 집회를 통해 히틀러는 군중의 선동과 함께 국가권력을 손에 넣을 구상을 했다. 하지만 쿠데타에 함께 나서기로 했던 카르와 로소브 장군의 배신으로 군에 체포되어 특별법정에 서게 되었다.
1924년 2월 뮌헨 블루텐부르크 거리 옛 사관학교 건물에 서 행해진 재판에서 히틀러는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조국과 민족, 역사의 이름으로 쿠데타를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방청석의 뜨거운 박수갈채는 법관에게도 전해진 듯, 그는 내란죄 최저 형량인 5년의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순교자이자 영웅이 되었다.
히틀러의 가족과 성장사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빈 북서쪽에 있는 체코에 가까운 농촌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미혼모였던 그의 어머니가 훗날 가구장이와 결혼하는 바람에 히틀러라는 성이 붙게 되었다. 알로이스는 13살에 고향을 떠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 도착, 17살에 직공 시험에 합격한 후 독학으로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 세무 관리가 되어 훗날 세무서장으로 승진했다. 학력이라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지만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일군 셈이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하녀로 둘째 부인의 병 간호를 하다가 알로이스의 아이를 임신했고 둘째 부인이 병사病死하면서 혼인신고를 통해 정식 부인이 되었다. 그런데, 클라라는 알로이스 의붓아버지 동생의 손녀였기에 남편임에도 ‘알로이스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클라라의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지만, 앞서 태어난 세 명의 자식이 모두 어릴 적에 죽는 바람에 클라라의 첫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아버지는 52살, 어머니는 28살이었으며, 이후 여동생 파울라가 탄생했다. 세무 관리였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히틀러는 여러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지만 아버지 직업 탓에 부유하게 살았다.
엄했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열심히 공부하길 원했고 초등학교 졸업 후 실업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부보다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아서 두 번이나 낙제를 했고 폐결핵에 걸려 자퇴까지 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고 이후 어머니는 47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장례를 치른 이복 남매 넷은 함께 모여 엄마의 재산을 정리해 유산을 똑같이 나누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히틀러는 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시도했지만 입학에 번번히 실패했다. 아카데미 원장은 히틀러와의 면담을 통해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권유했다. 히틀러가 미술을 좋아했지만 그림 그리는 실력은 매우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후 히틀러는 계속 빈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점심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고 저녁엔 오페라 극장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유산 중 상당 부분이 바그너 오페라 관람비용으로 지출되었다.
당시 빈에는 유대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갔다. 특히, 언론과 금융산업의 장악에 열심이었다. 독일계 주민의 시각으론 마치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위기와 질투감에서 출발한 반유대주의는 이념의 모습이 되었고, 이에 휘말린 히틀러의 내면에도 그 싹이 트고 있었다.
그림엽서를 그려 팔아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그에게 병무청에서 징집통지서가 날아들자, 비록 오스트리아가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곳일이지라도 그의 마음 속 조국은 독일이었기에 반유대주의자로 거듭 난 그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울 순 없었다. 1913년 5월, 24살의 나이로 독일 뮌헨에 도착했던 것이다.
집권과 독재
다시 란츠베르크 감옥 때로 돌아가보자. 당시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은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사실상 히틀러는 호사스런 감방 생활을 했다. 지지자들은 그에게 거의 매일 편지와 함께 치즈, 과일 등 다양한 식품들을 보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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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란츠베르크 감옥)
이에 한껏 고무된 히틀러는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을 출간할 계획을 구상했다. 1924년 7월, <나의 투쟁>은 이렇게 집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구술하고 그의 심복 헤스는 타자기를 두드렸다. 오스트리아 병역기피를 이렇게 미화했다.
“나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으나 내 민족과 독일 제국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실 히틀러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계속될 때 그는 뮌헨의 공산군에 가입했었다. 그의 삶에 군대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업에 투신하거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일은 그의 체질상 맞지 않았기에. 독일 공화국 정부가 대대적인 공산군 소탕에 돌입했을 때 진압군 측 조사위원회에서 일하며 공산군의 신상 정보를 제공했던 천부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군복무 시절, 유대인 얘기만 나오면 게거품을 물면서 핏대를 올리던 히틀러에게 붙여진 별명이 ‘몽상가’였다. 훗날 자신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떠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2급 철십자 훈장과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음으로써 자신감만은 넘쳐 흘렀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사색을 통해 비정규군을 동원한 폭력적 방법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닫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기로 결심했다. 모범수로서의 수감생활로 인해 1924년 12월 크리스마스를 곧 앞둔 어느 날, 그는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지자들과 함께 공식적인 정치 활동을 재개한 그는 민족사회주의당과 함께 ‘새로운 독일의 건설’이란 기치를 내걸고 투쟁을 시작했다. 1925년 7월, <나의 투쟁> 제1권이 뮌헨에서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며 점점 히틀러는 주목받게 된다. 이후 괴벨스가 히틀러 진영에 합류, 선동·선전 정치가 그 막을 올렸다. 사회주의를 불신하던 기업가들에겐 마르크스주의와 끝까지 투쟁하겠다면 안심시키고 1928년 제국의회 총선거에서 12개의 의석을 차지했다.
1929년 10월, 미국 주식사장의 붕괴와 함께 세계는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독일 경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을 닫는 기업들이 점점 증가하고 실업자들이 대거 발생했다. 1932년 독일은 결국 전쟁배상금 지급을 중지했다. 마침내 히틀러의 선동 정치에 빛이 찾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괴벨스의 ‘선전 전략’이 동원되고, 결국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당은 제2 정당으로 올라섰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양자 간 대결을 펼쳐 비록 패했지만 그의 이름을 유권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같은 해 7월 31일에 행해진 총선에서 마침내 민족사회주의당은 37.4%의 득표율로 최대 정당으로 우뚝 섰다. 1930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 취임했다. 당시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가 본국에 타전한 전문은 이러했다.
‘오늘 깡패들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
국가권력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나치의 행보는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나치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정부 기관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히틀러 추종자로 채웠다. 경찰지휘부는 나치 돌격대 지휘자들로 대체, 베를린 경찰청장엔 게슈타포로 불리는 비밀경찰 부서가 신설되었다. 언론 및 집회와 결사의 지유가 제한되면서 좌파 정당들은 선거 유세는 물론이고 당 기관지와 집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 모습은 현재 대한민국 야당에서 의회를 독재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주요 인사들을 탄핵시키고 언론과 주요 기관장을 자기편들로 채우는 행위와 흡사 닮아 있다.
1935년 12월엔 ‘히틀러 청소년단 법’이 제정되어 10세에서 18세 사이의 모든 남녀 청소년은 의무적으로 청소년단에 가입해야 했다. 나치 정권은 청소년에게 나치 이념을 주입시켜 유사시엔 이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하고 미래엔 나치의 핵심지지세력으로 키울 계획이었다.
학생들은 교사들로부터 끊임없이 전쟁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결과 나치가 주장했던 ‘베르사유 치욕을 씻기 위한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학교 교육은 군국주의 세뇌의 장이었다. 또 교사들의 나치 당원 가입이 봇물이 되어 1934년에는 전체 교사의 30%가 나치 당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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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목차)
평화와 인류에 대한 범죄
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구덩이에 넣고 총살을 자행한 나치 독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나치 정권의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침공을 기획, 준비, 지휘 및 수행한 독일의 정치가, 군인, 민족사회주의당 지도부 인사들은 ‘평화에 대한 범죄’로, 민간인과 전쟁포로에 대한 범죄 및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에 관련된 인사들에겐 ‘인류에 대한 범죄’로 처벌을 내렸다. 히틀러는 영웅을 연기한 광대였을 뿐이다. 독이 있는 나무엔 독이 있는 과일이 달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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