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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stone님의 서재
  • 초월하는 뇌
  • 앨런 라이트먼
  • 16,920원 (10%940)
  • 2025-01-10
  • : 4,570

나는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 경험이 원자와 분자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 중 일부와 그런 경험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본성을 원자와 분자라는 관점에서 온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화학, 생물학, 물리학의 법칙을 믿는다. 사실 한 명의 과학자로서 나는 그런 법칙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런 법칙들이 야생동물과 눈이 마주치는 1인칭 시점의 경험이나 그와 비슷한 초월적 순간까지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0과 1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만의 경험이 있다. - ‘서문’ 중에서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물리학자이자 인문학자이며 작가다. 하버드대학교와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MIT에서 인문학 교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이 책에서 “물질적인 뇌가 어떻게 자아, 영혼 같은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가”에 대해 응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데카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관한 인류 최고 지성의 사유와, 과학의 최전선에서 최신 이론을 만들어내는 동시대 고학자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의 초월적 경험 사이에 이 둘이 양립할 수 잇는 새로운 자리를 개척한다.


책은 총 5개 장으로 구성되어 1장과 2장에선 먼저 세상에 대한 비유물론적 관점을 살펴보고, 이어서 유물론적 관점에 대해 살펴본다. 비유물론적 관점은 영적 세계 전체를 아우르며 비물질적인 정신, 유령 등이 포함된다. 역사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들에 저자의 해석을 보태서 나중에 뇌, 의식, 영성에 대해 논의하는 데 필요한 배결지식을 제공한다.


3장에선 뇌를 물리적 대상으로 다루면서 의식이 어떻게 물질로 이루어진 뇌와 신경계에서 생겨날 수 있느냐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탐구하며, 4장에선 현대의 사회심리학자 신시아 프란츠의 연구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선 영적 유물론에 대한 주요 개념과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것이 가지는 중요성을 살펴본다.


육체의 지휘자, 영혼


책은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년)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18세기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로 그 세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대인으로 신앙심이 깊었지만 유대교도에서 비유대교도로 경계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사진, 모제스 멘델스존)


그는 가난한 ‘토라’ 필경사筆耕士의 아들로 태어나 수년 동안 비단 공장에서 일했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았음에도 자신의 사상을 기록으로 남긴 철학자나 신학자 중 비유물론적 존재인 영혼에 대해 그만큼 이성적으로 주장을 펼친 사람은 없다.


어릴 적부터 천문학, 수학, 철학을 공부했고, 시詩도 썼으며, 피아노도 배웠다. 16살에 라틴어를 배워 키케로의 책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고, 프랑스어와 영어 등도 익혀 5개 언어를 구사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어까지 배워 호메로스와 플라톤까지 원문으로 읽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박식가博識家였다.


플라톤의 <파이돈>을 새롭게 해석한 멘델스존의 걸작 <파이돈(또는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1767년)는 근대 유럽 세계를 대상으로 영혼의 필연성과 본질에 대해 이성적인 주장과 함께 설명함으로써 초판이 4개월 만에 매진되었고 네델란드·프랑스·이탈리아·덴마크·러시아·히브리어語로 번역되었다.


사실상 영혼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성적인 논증을 동원해도 증명할 수 없다. 영혼이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믿음을 신념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멘델스존의 추론을 존경함에 따라 영혼이 어떻게 존재하고, 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고 싶었다고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영혼은 항상 비물질적이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눈에 보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영원하며, 대체로 완벽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체는 결함이 있고, 일시적이며, 부패할 수 있다.(36쪽)


많은 사람들이 영혼, 그리고 영혼이 사는 영적 세계를 믿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엔 개인의 죽음을 넘어 존재를 계속 이어가고픈 욕망도 있고, 이에 대한 완벽성과 순수성에 대한 갈망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끔씩 다람쥐 챗바퀴 같은 고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멘델스존은 척추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며 유대인이란 이유로 야유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런 그에게 영혼의 세계는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해 준 듯하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진리와 완벽의 품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선 죽음이 동네 이웃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고대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영혼이 저승 하데스에서 영원히 고문당한다고 믿었기에 죽고 난 다음에 일어날 일에 더 큰 두려움을 가졌다. 지하 세계에서 가장 어둡고 끔찍한 곳은 ‘타르타로스’란 곳이었다.


서기 2세기에 만들어진 터키 남부의 대리석 조각엔 테살리아(그리스 동부지방) 라피스의 왕이었던 익시온이 석탄구덩이로 장인을 밀어 넣어 살해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익시온은 인류 최초의 친족 살해자인 셈이다. 이 장면의 무대가 타르타로스다.


(사진, 형벌을 받는 익시온)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최근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 절반 이상은 사람이 죽은 후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지는 지옥地獄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유명한 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저술한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9년~기원전 55년)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가 원자 가설을 지지했던 가장 큰 동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자연은 각각의 것들을 다시금 그 자신의 알갱이로 해체한다는 것, 그래서 사물들은 결코 무無로 돌아가지 않는다.” - 루크레티우스


루크레티우스는 사람을 구성하는 원자가 한때는 이전에 살았던 사람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또다시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될 것이란 개념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우리와 나머지 인류 사이를, 과거와 미래 사이를 유의미하게 연결해 준다. 나아가 그는 우주적 생명관을 견지함으로써 우주의 다른 곳에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상정한 철학자인 셈이다.


유물론자와 비유물론자의 가장 큰 차이는 죽음을 향한 태도다. 소크라테스나 성聖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비유물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죽음을 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착하게 살았다면) 불멸의 비물질적 영혼이 영원히 복福된 사후 세계를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배毒盃를 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전이었다면 죽음을 슬퍼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도 아직 무언가 남아있고,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선한 자에게는 훨씬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피크로스와 루크레티우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죽고 나면 우리 모두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도 남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뇌의 활성과 뉴런


현대의 생물학과 신경과학 지식에 따라 우리는 뇌의 활성이 뉴런, 그리고 뉴런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의 뇌에는 1000억 개 정도의 뉴런이 있다. 사람의 뉴런 갯수는 아프리카 코끼리와 일부 고래를 제외하면 동물들 중에서 제일 많다. 그렇다고 고래와 코끼리가 인간보다 더 똑똑한가? 그렇다. 지능에서 가장 중요한 척도가 뉴런의 절대적인 갯수가 아니다.


의식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대량의 뉴런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개개의 뉴런은 특화된 활성을 나타낼 수 있다. 복잡한 뇌 활성과 의식은 뉴런의 총 숫자뿐만 아니라 뉴런 간 연결 숫자와도 상관관계가 있다.


초월적 경험


저자는 영성을 자연, 우주, 타인과 연결된 느낌,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 경외감의 경험 등으로 정의한다. 이는 모두 생존에 실질적인 이점을 주는 다른 특성에서 비롯된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창의적 초월 경험은 우리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순수한 바라봄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하고 벅찬 감각에 붙인 이름이다. 화가, 음악가, 무용수, 소설가, 과학자, 그리고 우리는 모두 창의적 초월을 경험한다.


초월적 경험은 수량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결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다. 신은 물리적 우주 바깥에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감정이다.” -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이 말한 ‘신비’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마법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곳은 우리를 도발하고 창의성을 자극하며, 우리에게 놀라움을 가득 안겨주는 장소다. 과학자와 예술가,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주에 대한 경외심과 경이로움으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벼랑 위에 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붙이고, 주민등록번호를 새겨 넣을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 원자의 과정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원자는 분명 다른 사람, 어떤 특정 인물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별과 연결되어 있고, 미래 세대의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인 우주에서도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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