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있다. 우리뿐이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 물론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대 우리 집에서 일흔여덟 걸음 정도 떨어진 집에 나이 든 부부가 살았으니 말이다. 그 집의 이름은 서닝데일이다. 그 부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종말’ 이후에 떠났다. - ‘덜란’(13쪽) 중에서
(사진, 책표지)
이 소설의 저자 마논 스테판 로스는 모국어인 웨일스어語로 지금까지 4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첫 소설로 단숨에 2010년 웨일스 올해의 책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로 웨일스어로 글 쓰는 작가 중 가장 뛰어난 작가로 평가받는다. 웨일스 교과서에 수록되며 큰 주목을 받아온 <네보의 푸른 책>은 2023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청소년문학상인 카네기메달을 수상했다.
아들과 엄마의 아름다운 생존기
어느 날, 미용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미국의 몇몇 대도시에 폭탄이 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미용실(주인장 게이노르)에서 일하던 로웨나(생존자 엄마)는 재빨리 고객의 머리 손질을 끝낸 뒤 몸이 좋지 않다는 거짓말로 오후를 통째로 쉬었다.
로웨나는 자동차 대여소에서 화물용 밴을 렌트해서 대형마트로 갔다. 이미 공포심이 많은 사람들이 사재기하려고 마트 안은 붐볐다. 로웨나는 여러 종류의 봉투쌀, 병아리콩, 강낭콩, 통보리 등을 카트에 담고 또 담았다. 그리고 철물점에 들러 못, 나사, 배터리, 손전등, 방수포, 비닐하우스 재료, 많은 씨앗, 사과나무 묘목 2그루, 밭작업용 쇠스랑과 삽, 쥐약 등도 구매했다.
귀가길에 슈퍼마켔에 들러서 아들 덜란에게 줄 초콜릿 몇 개를 샀다. 이렇게 구매한 물품 모두를 집 차고에 쌓았다. 그리고 인터넷을 검색해 식물 기르는 법, 토끼 덫 만드는 법, 약초를 사용하는 민간요법, 식용가능한 야생 식물, 식수 정화법 등을 프린터로 모두 뽑았다.
이후 며칠 동안 예전과 같은 일상이 계속되었다. 아들 덜란은 등교했고, 로웨나는 여자 손님의 머리카락를 손질했다. 그래서 차고에 쌓아둔 비상물품을 볼 때 빚까지 얻어 구매한 일이 어리석은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노老부인의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던 중 갑자기 정전이 되더니 이후 끊긴 전기는 감감 소식이었다. 미용실 안은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급히 손님의 머리를 찬물로 감겼다. 학교도 정전일 것 같아 덜란을 데려오려고 게이노르에게 양해를 구하자, 전기가 들어올 것 같지 않다며 아예 퇴근을 허용했다. 그 뒤로 전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막연히 기다렸지만 그 기간이 점점 길어지자 아예 포기했다. 디스토피아 초기와 다름 없었다.
미국 대도시에 떨어진 폭탄은 바로 핵폭발이었다. 엄마 로웨나는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길옆에 쳐놓은 덫을 확인하러 나갔다. 뿌연 갈색 또는 회색이 가득한 바깥 날씨는 마치 더러운 담요 같았다. 짙은 공기가 무더운 것이 비가 올 것 같았다. 밭에 심은 채소들에겐 좋겠지만, 로웨나에겐 햇빛이 필요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로웨나에겐 글쓰기가 낯설다. 쓰고 나서 읽어보면 현실 같지가 않았다. 꼭 남에게 일어난 일 같고, 진짜 세계의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종말 이후로 작가들이 세상을 떠났으니 무언가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종말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일어났다.
아들 덜란은 손에 칼을 들고 덫에 걸린 짐승에게로 다가갔다. 토끼가 멀쩡하지 않았다. 마치 두 마리인 듯 보였다. 몸은 하나지만 머리에 물렁물렁한 덩어리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거기에 작은 입과 이빨, 조그만 귀 두 개가 있었다. 마치 눈알을 빼앗긴 듯한 죽은 눈 두 개도 있다. 역겨워서 구토했다. 얼굴이 두 개인 토끼라니, 예전의 귀엽던 모습이 많이 변형되어 있었다. 핵폭발이 초래한 이 세상의 광경이었다.
오늘은 비가 온다. 굵고 뜨거운 빗방울이 집 위로 사납게 내리꽂힌다. 종말 이후로 세상에는 물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로웨니는 물에 대해 글을 썼다. ‘예전의 비 같지 않다. 지금의 세상에 내리는 비는 화가 나 있다. 비뿐만 아니라 모든 날씨가 다 성난 것 같다.’ 이건 종말 이후로 또 하나 달라진 점이다.
핵폭발로 인한 종말이후 살아남은 로웨나와 덜란, 두 모자의 일상이 번갈아 가며 펼쳐진다. 디스토피아 세상은 모든 게 달라졌다. 햇빛도 부족하고 희뿌연 날씨가 계속되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 모자는 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후세인들을 위해 이같은 참상을 글로 남긴다.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우리들에게 이런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진다면, 무엇을 해야할지 그리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 고민 속에 빠져들게 민든다. 종말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올 것이다. SF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본 모습이 현실로 내게 다가온다면 과연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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