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정의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불의가 판을 친다. 고대 철학자들은 신중함이 대담함을 누그러뜨리고, 즐거움이 지나친 자제력을 느슨하게 해주지만 정의는 그 자체의 힘을 상쇄할 미덕이 전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올바른 것이란 우리가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여는 글’ 중에서
“선한 사람은 가장 빛나는 미덕인 정의를 통해 선하다는 칭호를 얻는다.” - 키케로
(사진, 책표지)
먼저 이 책의 저자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이언 홀리데이, 그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스토아철학의 정신을 계승한 철학자이며 전 세계 40개국 1천만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는 스토아철학의 네 가지 핵심 덕목德目인 용기, 절제, 정의, 지혜를 소개하는 스토아철학 4부작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이 책은 이미 출간된 <브레이브>(2022년), <절제 수업>(2023년)에 이은 세 번째 책에 해당한다.
<브레이브>에서 그는 ‘용기’를 가장 위험한 자리로 기꺼이 나아가려는 의지라고, <절제 수업>에서 ‘절제’를 그 위험한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각각 말했다. 이 책 <정의 수업>에서 ‘정의’는 그 위험한 자리에서 공정함을 지키는 태도임을 강조한다.
책은 총3부로 구성되어 1부(냉소와 이기심을 넘어서)에선 개인의 정의를, 2부(책임의 무게를 지탱하려면)에선 타인을 위한 정의를, 마지막으로 3부(사랑과 연민으로 나아가는 길)에선 세상을 향한 정읠를 각각 논하고 있다. 정의가 깨어진 채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저자는 깊은 울림을 주며 경종警鐘을 울린다.
개인의 정의正義
우리들은 매우 큰 착각을 한다. 정의란 매우 고상하고 특별히 상층부에 자리잡은 단어이자 표현하기 힘든 그런 이미지로 말이다. 하지만 정의를 추구하는 삶은 우리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시작되는 게 결코 아니다. 이는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우리 주변에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상황이 곤란할 때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입만 열면 거짓말로 그런 상황을 넘기거나 남 탓으로 돌리면서 애매모호한 말투로 얼버무리는 이 시대의 눈에 특히 띄는 정치인이 있다.
어떤 정치인은 사소한 문제를 중요한 것처럼 큰소리를 치며 과장한다. 허장성세虛張聲勢다. 삼국지에도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진秦나라의 한 장군이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위魏나라의 성을 공격할 때 엄청 많은 깃발로 마치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며 아예 싸움을 포기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치게 만들었다는 허망한 전술이다. 또 이들은 거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죄를 짓고도 정치적 보복이라고 떠드는 그 사람의 수법이다.
황제가 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정책을 펼치면서 솔직하지 않은 사람을 경멸했다. 특히 그는 “솔직하게 말하자면”이라고 주의를 끌며 발언했던 사람을 경멸했다. 무심코 내뱉는 그런 말은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정직함에는 서두序頭가 필요 없다. 마르쿠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직한 사람은 악취가 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나가기만 해도 알 수 있다.”(60쪽)
비밀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어떤 일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애초에 그 일을 하지 않는 편이 가장 좋다.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면 올바른 행동이 아닐 것이므로 그 반대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지위와 지인을 이용해 엄청난 특혜를 부여하며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에 개입, 이를 영원히 숨겨려고 주변 사람들이 자살하도록 만드는 행위는 결코 올바른 행위가 아니며 정의는 더 더욱 아닌 것이다.
“엄격하고 올바른 규범을 지키는 모든 행동은 어둠 속을 비추는 손전등과 같다.”
타인을 위한 정의正義
“정의는 우리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미덕이다.” - 소크라테스
공동체의 정의는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개인만을 위한 것이었던 적도 없었다. 청렴한 사람이 되는 일은 중요하다. 왜 그럴까?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 철학자처럼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善한 일을 하기 위해 함께 힘을 합친다.
1787년 5월, 12명의 사람들이 런던 중심부의 한 인쇄소에 모였다. 이들은 노예무역의 부당함을 폴로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엔 젊은이, 노인, 부자, 빈자貧者, 퀘이크교도, 영국 성공회 신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소규모 집회가 있기 두 해 전 1785년에 12명 무리 중 한 명인 토머스 클라크슨이 대학교에서 개최된 에세이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우승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혼ㄴ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 수준의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노예무역을 적극적으로 조사,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루 16시간씩 연구하고 한 달에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여러 기록들을 검토하며 면담까지 진행했던 것이다.
이같은 일이 계기가 된 이후, 여성 참정권, 노예해방 등 인권人權운동으로 확산되며 심지어 신생국가 미국에선 노예해방 찬반으로 인해 남북전쟁까지 발생했다. 정의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정의는 실현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의는 여전히 실현되고 있다. 함께 힘을 합친 사람들,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통해 실현된다. 그렇다. 정의는 전염성이 강하다.
시작했다면 이긴 것이다. 처음부터 충분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변화가 시작된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첫 번째 행동은 성명을 내는 것이다. 어쩌면 전체 연설 중 가장 강력한 성명서일 수도 있다. 그 성명서를 통해 정의의 횃불은 계속 타오른다. 세상은 어렵고 힘든 문제들로 가득하지만, 주변의 일에 집중하고 할 수 있는 선행善行을 실천하면 조금씩 진전을 이룰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도 그 시작은 쉬우며, 세상에서 가장 큰 일도 그 시작은 미세하다.” - 노자, <도덕경> 중에서
권력의 반대말은 무력함이다. 지금도 우리들은 사이비 정치 패거리들이 펼치는 계속된 탄핵 정치에서 이를 목도할 수 있다. 다수당이란 이점을 내세워 의회 독재를 일삼으며 툭하면 자신들의 정적을 탄핵으로 몰고 간다. 이렇게 당하는 약자의 무력함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불의에 항의하여 사임하거나 상대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을 수도 있다. 또 세상이 부패했고 끝장났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으로 뭐가 달라질까? 겨우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분노만 터트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022년 2월, 강대국 러시아의 약탈적인 무력 침공에 대항하며 현재까지 장기전을 펼치는 우크라이나를 보라. 강자强者는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눈치를 보지 않고 행한다. 약자弱者는 오직 고통받는 세상이 되어버린다. 이런 세상은 올바르지도 않고 청렴하지도 않다.
“결국 힘에 맞설 힘과 권력에 맞설 권력을 끌어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즉 권력에 맞설 권력만이 유일하게 존경받는 힘이다.”
세상을 향한 정의正義
청렴한 사람 그 이상이 되는 일, 타인에게 배려와 연민을 갖는 태도 그 이상의 일이 있다. 바로 선량함으로서 위대해지는 일이다. 세계 문화와 전통마다 성자聖者가 존재한다. 그런 성자는 용기와 정의로 소명에 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초인적超人的인 평정심과 품위를 지니고서 매우 이타적利他的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일이 된다.
“그래도 인생이 살 만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나타났던 성자들이었다. 그 성자들은 이타작이며 훌륭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 커트 보니것, 미국 소설가
마하트마 간디(1869~1948년)는 투쟁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었다. 더구나 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간디가 남들보다 큰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군대 지휘관도 아니었으며, 큰 재산을 가진 부자도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전사들처럼 샌드를 신고 반나체의 옷차림을 하고서 싸웠다. 비폭력저항이었다.
열다섯 살 때 형의 돈을 훔쳤던 그는 자신의 죄를 밝히고 처벌을 청하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전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누공瘻孔이란 병으로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일어나 앉아 이 편지를 읽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지를 찢고선 다시 누웠다. 용서받은 그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갓 결혼한 상황이라 아버지 간호를 삼촌에게 부탁하고 신혼을 즐겼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한동안 자신의 육욕肉慾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을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에겐 새로운 기회였다. 인도를 떠나 영국 런던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법학과를 졸업한 직후 그의 형제가 인도에서 영국 식민지 관료와 말썽이 생겨 이를 수습코자 상대를 만나러 갔다. 그는 숙련된 변호사로 고국에 돌아온 터라 인간 대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일 처리에 나섰지만 영국 식민지 관료들은 그를 난폭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또 의뢰받은 소송 때문에 기차를 타고 남아프리카연방의 프리토리아로 가던 중, 그는 1등석 기차표를 구매했지만 인종차별로 인해 3등석에 앉아야만 했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당하게 열차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혼자서 춥고 긴 밤을 철로 옆에서 보내고 역마차를 타고 이동하려다가 백인들이 앉는 안쪽 자리에 앉으려다 제지당하고 마부에게 폭행까지 당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충격적인 경험은 간디를 소극적이 법학도에서 개혁운동가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간디의 저항은 초기엔 작은 일부터 시작되었다. 가난한 노동자들뿐 아니라 종교적 이유로 법정에서 모자를 벗지 않길 원하는 이슬람교도까지 대변했다. 또 그는 인도인들의 평등권을 주장하는 소책자를 발행하고 소규모 신문도 창간했다.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킬 비폭력의 힘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다.
인류가 ‘위대한 하나’라는 사실에 진정한 경외심을 느끼게 되면 겸손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더욱 관대해지고 더욱 용기를 갖게 되고 더욱 옳은 일에 헌신하게 된다. 더욱이 터무니없는 하찮은 일, 무의미한 구분과 차별, 악의와 고통에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도의 행복감이며, 또한 인간 존재에 관한 굉장한 깨달음이다.(336쪽)
지금 당장 옳은 일을 하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까 선량한 사람이 되고 선善한 일을 하자.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자. 이 세상을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보다 더 좋게 만들고 떠나기 위해 노력하자. 옳은 일을 하자.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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