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시기와 지역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늘 있었다. 19세기 스위스의 문화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시대의 갱신과 발전을 위해 위기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위기를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대응하라는 말인 듯 싶다. 위기를 예방하거나 대처 및 복구로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역사적 맥락에서 위기와 위기관리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차용주는 서양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유엔 사회개발 연구소 등 여러 국제 기관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한 바 있으며, 다수의 저서와 논문 등을 집필했다.
책은 환경 위기 속에서 돌파구를 찾은 역사, 정치 위기 속에서 길을 찾은 역사, 위기를 기회로 만든 성찰과 교류의 역사 등 총 3부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과거 언론에 게재했던 글들을 중심으로 다시 쓴 것이다.
로마제국을 덮친 역병
안토니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공동 황제 시대에 대대적인 감염병이 확산되면서 로마제국을 위기에 빠뜨렸다. ‘안토니우스 역병’이다. 당시 로마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팍스 로마나)였지만 이 질병로 인해 인구의 20~30%가 사망함으로써 사회적 혼란은 엄청났던 것이다. 이 질병의 실체는 바로 천연두였는데, 서기 165년부터 무려 20여 년간 지속된 질병이었다.
쥘 엘리 들로네, <로마의 역병>(1869년)
(사진, 로마의 역병)
또 3세기 중반(249~262년)에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번지면서 재차 로마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길에 버려진 시체들이 넘쳐 났고 감염자들도 방치될 뿐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늙은 부모를 방치함으로써 거리엔 아사餓死한 감염자들과 이들 시신이 늘려 있었다.
이 병에 대한 키프리아누스의 기록('죽음에 대하여')에 따르면 역병에 감염된 사람은 극심한 눈의 통증과 갑작스러운 발열 등 모든 사지에서 고통을 느꼈다. 목 안에서 불에 덴 것 같은 고통을 겪었고, 구토와 혈변이 이어졌으며, 정도가 심해지면 팔다리와 같은 신체 부위는 괴사해 잘려 나갔고 사람들은 시력과 청력을 잃고 심신의 힘을 잃어갔다. 천연두와는 다른 감염병이었다.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에서 창궐한 감염병이 국경을 넘어 로마제국까지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시절이라 상인, 군인 등의 이동에 의해 급속하게 널리 퍼져 나갔을 것이다.
로마령 카르타고의 주교 성 聖 키프리아누스는 신자들에게 병에 걸린 이웃을 외면 말고 적극적으로 돌보라고 권했다. 돈많은 부자들은 기금을 출연하고 가난한 신자들은 봉사하는 일을 맡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인 로마인들의 태도와는 달랐다. 심지어 그들을 박해하고 살해했던 사람들까지 사랑하고 구원했던 것이다. 이후 그리스도교 신도는 4만 명에서 6백만 명으로 급증했다.
로마제국은 ‘안토니우스 역병‘으로 성장을 멈추게 되었으며,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재차 휘청거리게 되었다. 역병의 창궐은 로마제국 멸망의 서막과 같았다.
중세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
14세기 중반 유럽 사회엔 흑사병이 널리 유행했다. 불과 6년 만에 인구의 3분의1 내지는 2분의 1 정도가 사망한 엄청난 재앙이었다. 흑사병의 유행기엔 항구에 입항하는 배의 선원들은 지정 장소에서 40일 동안 격리되어야만 했다.
도시 간 왕래와 모임 금지, 공중위생과 환경 개선 조치를 했지만 백약무효인 셈이었다. 주거지에서 많이 떨어진 장소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매장하는 일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특히, 가난한 자들은 생계를 위해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이 전염병에 집중적으로 희생되었다.
생활 환경이 열악한 빈민 지역은 흑사병의 발원지였다. 심지어 패닉에 빠져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거짓 소문까지 돌면서 1348년에서 1351년 사이에 오늘날 중부 유럽 지역에선 억울한 유대인들의 죽음이 있었다.
힘없는 약자들에게 내리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자 그 원인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즉 흑사병은 인간의 죄를 징벌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스스로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채찍질 고행단’이 등장했다. 이웃을 대신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는 자발적 고행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1812~14년)
(사진, 채찍질 고행단)
역사가 알려주는 위기의 시사점
고대의 역병과 중세의 흑사병이 불러온 서로 다른 위기 대응 양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위기 상황에서 사회의 흥망성쇠는 지도자의 올바른 상황 인식 능력에 달렸다. 둘째, 지도부는 문제의 근원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셋째, 위기를 이겨 내려면 신뢰를 얻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을 핍박했던 원수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었기에 감염병이 돌 때마다 개종자 수가 늘어났다는 걸 기억하자. 위기 상황에서 진정성이 신뢰라는 자본을 쌓은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이타주의는 감염병 위기를 헤쳐나가는 주요 대처 방안이다. 프랑스의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도 “타인의 불행은 내게 재앙이 된다”라고 말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게 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사의 가르침을 외면한 지도자
“혼혈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이는 2022년 한 정치 집회에서 헝가리 총리가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15년부터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으로 몰려들어 뒤섞여 살게 되면서 단일 민족인 헝거리인은 혼혈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삼십대에 총리에 올라 5회 연속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다.
헝가리 왕국을 세운 이슈트반 1세는 현재의 독일을 통치했던 신성로마제국 출신 여성을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유럽의 변방에서 서유럽 세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결혼으로 헝가리와 서유럽 간의 이주와 교류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여러 지역 출신자들을 포용함으로써 왕국과 왕실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단일 언어와 풍습에 얽매여 나약한 국가로 머물지 않고자 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남긴 십훈十訓 중의 하나가 ‘이주자들의 대우와 환대’였다.
왕국을 건국한 이슈트반 1세의 유훈과 달리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헝가리는 서방의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러시아나 중국 같은 국가를 모델로 삼아 나아가야 한다”라면서 서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다. 헝가리의 미래를 지켜볼 일이다.
종교의 평화적 공존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1996년에 <문명의 충돌>이란 책을 발표, 동서 냉전 대립이 문명 간의 갈등으로 다극화하면서 전쟁의 역사가 지속될 거라는 ‘문명충돌론’을 설파했다. 이 도서의 원제목은 ‘’(문명의 충돌과 세계 질서의 재정립)이다.
그는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만나는 단층선斷層線에 주목, 역사적으로 이곳은 피로 물든 경계선이었으며 21세기에도 서구 주도의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갈등의 무대가 될 거라고 예견했다.
이같은 예견 이후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코소보 전쟁, 9·11 테러,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 최근의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 등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적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두 종교간의 갈등과 전쟁 국면에 비해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던 기간이 훨씬 더 길다. 또한 문명 간 경계는 이질적인 다양한 문화가 만나 뒤섞여 새로움이 창조된 접경 공간이었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의 제스처
정치에서 제스처는 일종의 게임 규칙과 같다. 정치가의 제스처는 정해진 절차와 방식을 따르는 공적 의례와 같다. 정치는 공적 영역에서 행해지므로 더 더욱 규칙을 지키고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표현되는 정치사의 제스처는 공적 선언과 다름없다.
1979년,소련 브레즈네프(왼쪽)과 동독 에리히 호네저(우측)
(사진, 베를린 장벽의 벽화)
정치가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국민들과 만나는 장場이다. 즉흥적으로,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주인인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제스처여야 한다. 권력은 결코 사유물이 아니므로 자신의 죄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판을 연기하는 그런 제스처는 결코 행해선 안된다. 또 다수당이란 결정적인 이점을 앞세워 의회를 독재하면서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이나 정당을 향해 툭하면 탄핵 표결을 진행하는 그런 정치가는 정치를 새로 배워야 할 대상이라고 판단된다.
용서란는 선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로 마침내 폴란드는 독립을 쟁취했다. 독일이 점령했던 상당 부분의 영토를 다시 귀속시켰다. 이에 양국간의 적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독일인은 신생 국가인 폴란드를 ‘강도’로, 폴란드 사람들은 ‘늑대 또는 들쥐’로 묘사했다. 반면 폴란드는 수복된 땅이 본래 자국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면서 약탈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독일의 역사를 들추었다.
결국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폴란드를 침공(1939년)했다. 탈환된 지역에선 다시 독일화가 진행,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인이 무려 6백만 명 이상 사망했다. 이는 폴란드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은 아우슈비츠 등지에 집단 학살 수용소를 만들어 2백만 명 이상의 폴란드계 유대인을 학살했다. 전후에 새로운 국경선이 제정되고, 폴란드는 남한 면적보다 넓은 땅을 패전국 독일로부터 얻어냈다.
새롭게 귀속된 국경 지대에 4백만 명 넘게 강제 이주되는 동안 독일인들은 폴란드인의 잔혹 행위에 속수무책이었다. 나치 정권의 학살에 대한 일종의 보복 행위였다. ‘피추방민협회’를 결성한 독일의 강제 추방민들은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다.
종전 20주년을 맞은 1965년 공산 치하의 폴란드 가톨릭 주교단은 서독 주교단에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은 지난 천년 동안 양국 관계에서 긍정적인 역사에 주목했다. 아래와 같은 문구로 서신은 마무리되었다.
(사진, 서신 문구)
용서容恕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페시스’(aphesis)인데 ‘빚을 면제해 줌’을 뜻한다. 상대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얽매여 과거에만 머문다면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빚에서 해방되게 해주는,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공자의 사상은 '충忠과 서恕'라고 할 수 있다. 춘추좌씨전에서 충은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이며 서는 같은 마음(如心)이며 동감, 공감, 동심으로 풀이하였다. 恕를 파자破字하면 같은 如와 마음 心으로 분리할 수 있다. 즉 용서라는 어진 행동은 내 마음을 남의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恕仁也從心如).
즉 용서는 잘못으로 뒤엉킨 삶의 자리에 낡은 감정을 지워 버리고 더 나은 것으로 채우는 선물이다. 받으면 좋은 게 선물이다. 나 자신을 위해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 이제 나를 위해 용서하자. 용서할 수 없으면 잊기라도 하자.
위기를 넘어 화해와 용서로
한자어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합친 말이다. 즉 위기는 부정적 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고비인 셈이다. 영어의 위기crisis는 고대 그리스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데, ‘나누다, 선택하다, 판단하다, 결정하다’ 등의 뜻을 지녔다고 한다. 요컨대 위기는 양면의 속성을 지닌 셈이다. 미래 세대에게 지속가능한 안정을 제공하려면 공동선公同善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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