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허블에서 제공한 가제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제2회 과학문학상 대상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포함한 7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사로잡힌 작품은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다.
한국인 우주인 후보로 선정된 가윤은 터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젊은 엘리트 여성이다. 터널은 저 너머의 다른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초소형 블랙홀의 외관을 한 일종의 연결통로다.
터널을 통과하기 위한 우주인 후보로 선발된 가윤은 터널 통과를 위해 압력과 중력가속도에 견디기 위한 신체 개조를 받아야 한다. 사이보그 그라인딩이라 불리는 이 신체 개조 과정은 가윤의 이모―나중에 밝혀지지만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사이가 아닌―이자 최초의 터널 프로젝트를 수행한 우주인이었던 재경 역시 겪었던 과정이다.
최초의 터널 우주 비행사이자, 한국인 여성, 그것도 마흔 여덟 살의 중년 여성인 재경은 그녀를 향한 사회적 압박을 물리치고 사이보그 그라인딩을 견뎌낸 유능한 여성이었다. 그런 재경은 당연히 가윤의 롤모델이자 영웅이었다.
그러나 터널 프로젝트를 수행할 우주인 후보로 선발된 후 가윤은 자신만 알지 못했던, 감춰진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영웅이었던 재경이 터널 프로젝트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최종 테스트까지 견뎌 냈음에도 도망치듯 자살했다는 사실이었다.
재경은 터널 건너편의 새로운 우주로 넘어가기 위한 혹독한 신체 개조 과정을 마쳤지만, 터널로 가는 캡슐에는 탑승조차 하지 않았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재경을 영웅으로 생각하며 그녀의 길을 따라 걸었던 가윤은 신체 강화 훈련을 견디며 어째서 재경이 출발 직전 그런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것인지 생각한다.
가윤은 재경이 자살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그녀를 비난하지는 못한다. 여성이 여성을 쉽게 비난하지 못하는 그 지점을 소설은 이렇게 드러낸다. 여성이기에 맞닥트리는 사회적 압박,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와 자신의 존재가 여성 대표인 것처럼 강제로 붙여지는 주홍글씨 같은 타이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떻게 가윤이 모를 수 있겠는가. 자신의 영웅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윤은 재경의 선택에 대해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한다.
그리고 가윤은 이유를 찾아내는데, 그 이유야말로 이 단편에서 가장 유머가 넘치고, 가장 당황스럽고, 가장 타당하여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재경은 신체 개조로 완성된 강인한 육체가 극한의 장소인 심해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만 놓고 보면 재경은 자신이 성취해 낼 최고의 성과를 눈앞에 두고 모든 사람―거의 전인류에 가까운―의 기대와 신뢰를 무참히 박살 낸 사이코패스 혹은 부적합자, 낙오자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 한 장면을 통해 만약 이 세계와 우주를 관망하는 하나의 시선이자 기술력을 신이라 부른다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런 신의 논리가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여성인 내가 어디까지 내 맘대로 살 수 있을까를 상상했다.
나 역시도 최고의 과학기술로 강화된 신체를 통해 온전히 나 자신의 능력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험해 볼 기회가 온다면, 재경과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강화된 신체에 대한 욕망은 여성으로 살아온 내게 늘 존재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주인공인 가윤을 재경을 비추는 거울이나, 영웅의 뒤를 좇는 존재로 끝내지 않는다. 가윤은 재경이 보지 못한, 혹은 보지 않기를 선택한 또다른 우주의 존재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갈망하고 노력하는 어엿한 한 여성이며, 소설의 결말은 가윤과 재경, 두 명의 여성을 온전히 지지한다.
신체를 강화하는 기능적 의미의 개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의미심장하게도 단편집의 맨 끝에 실려 있다.
여성 우주 비행사의 임무 수행에서 생리가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 놀랍도록 균형을 잃은 시대다.
모두들 읽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