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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마님의 서재
  • 이야기꾼 에세이
  • 발터 벤야민
  • 16,200원 (10%900)
  • 2025-10-25
  • : 13,185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는 이야기의 의의와 역할, 그리고 사라짐의 역사를 말한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지혜였고, 이야기꾼은 그 지혜를 옮겨 심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대가 사람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들고 삶을 정보로 잘게 쪼개면서 이들은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로 인해 집단적 경험도 함께 끊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이 형식은 현대의 이야기꾼 웹 소설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금 이들이 우리 곁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살펴보자.


『이야기꾼 에세이』는 발터 벤야민이 193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근대 사회에서 ‘이야기’라는 형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소멸했는지를 다룬다. 그는 구전 전통 속에서 경험과 지혜를 전하는 역할을 했던 ‘이야기꾼’을 중심에 놓고, 소설의 등장, 정보의 확산, 근대적 개인의 부상이 이야기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 글은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 경험의 전달 방식, 기억과 전승의 역할 등을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탐구한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의 정의를 한 사람의 체험을 넘어선 경험을 건져 올려 지혜로 바꾸는 존재라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겪어온 시간의 결을 묶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이들이며, 삶의 무게를 말 한 줄로 정리해 건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설명이 아니라 전승이다. 이야기는 이 전승을 통해 변주되며 살아남고, 듣는 이가 다시 이어 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야기꾼은 바로 이 열린 서사의 흐름을 유지시키는 매개자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 이후 점차 사라진다.



근대 이후 그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경험지의 실종 때문이다. 전략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진지전에 의해, 경제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신체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배고픔에 의해, 인륜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까발려지면서 경험지를 잃어버렸다. 이후 인간은 정보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고 더는 집단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문자로 된 소설은 왜 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벤야민이 보기엔 소설이 이야기꾼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다. 이야기는 공동체가 축적해온 경험을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엮어내는 전승의 형식이지만, 소설은 고립된 개인이 만든 완결된 텍스트다. 서사가 끝나도 계속 변주되지만, 소설은 종이 위에 고정되는 순간 서사가 닫힌다. 이 닫힌 구조는 독자가 끼어들 틈을 거의 남기지 않고, 세대 간에 움직이며 변형될 여지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순환의 회로 바깥에 머무르며, 서사의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근대 이후 인간은 경험지를 잃고 정보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다. 소설은 이 흐름 속에서 점차 정보의 형식에 가까워졌고, 경험의 농도보다는 재현과 설명을 우선하는 장르가 되었다. 이야기가 삶의 잔여물을 지혜로 압축해 건네는 작업이라면, 소설은 삶을 미학적으로 구성해 해석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소설은 전승의 구조를 수행할 수 없고, 결국 이야기꾼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적 차이는 장르가 세상과 맺는 관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근대는 경험을 해체했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경험 없이 살 수 없다. 이 모순이 내면에 커다란 공백을 남겼다. 삶은 정보로 가득한데 마음은 여전히 이야기적 경험을 갈망하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정보는 즉각 사라지지만 경험은 시간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시대이다. 바로 이 공백이 다시 열린 서사를 불러들이는 힘이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잃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구조를 찾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서사가 제공하는 작은 질서와 위안을 무의식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이런 결핍은 결국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요구가 닿은 자리가 바로 웹이라는 공간이다. 웹 소설은 경험 그 자체를 담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구조를 거의 완전하게 복원했다. 외전 요청, 다음 회차의 가능성, 댓글로 이어지는 참여는 독자가 서사의 회로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방식이다. 근대가 지워버린 순환하는 경험의 형식이 여기서 기묘하게 되살아난다. 웹 소설이 주는 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현실에서 사라진 감각을 대신 체험하게 하는 대체 경험성이다.


재미는 껍데기일 뿐이다. 독자는 웹 소설을 통해 좌절–보상–성장–위기 같은 감정의 리듬을 반복적으로 통과하며, 잃어버린 경험의 흐름을 감정의 회로로 흉내 낸다. 현실이 더 이상 경험을 축적하게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웹 소설은 이야기의 잔해를 감정의 패턴으로 모방해 살아남게 만든다. 이 반복이 중독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의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오래된 충동이 웹이라는 좁은 통로에서 비틀린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비틀린 흐름 속에서라도 다시 경험을 되찾으려 몸을 기울인다.



경험의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충동은 결국 벤야민이 애도했던 자리를 다시 불러낸다. 이야기꾼이 사라진 시대에 웹은 ‘이야기의 형식’을 되살렸고, 그 형식은 셰에 라자드가 밤마다 이어가던 아라비안나이트의 구조와 닮아 있다. 끝이 열려 있고, 다음 이야기가 가능하며, 듣는 이의 개입을 허용하는 서사. 경험의 깊이는 아니지만 경험의 움직임을 다시 작동시키는 방식. 웹 소설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의 서사는 그 오래된 구조를 웹이라는 좁은 통로에서 되살려 새로운 회로를 만든 것이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근대가 이야기꾼을 잃고, 사람들이 더 이상 경험을 전승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애도한 것은 바로 그 단절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종이를 떠난 뒤 웹으로 옮겨가 감정의 리듬을 반복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이어붙이고 있다. 이야기꾼은 죽었어도 이야기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란 형식보다 욕망이 먼저였고, 그 욕망은 현대의 이야기꾼 웹 소설이라는 형태로 자연스레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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