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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마님의 서재
  • 제임스
  • 퍼시벌 에버렛
  • 15,750원 (10%870)
  • 2025-09-04
  • : 9,045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해문 클럽 첫 선정작은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이다. 이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헉의 동행자 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며, 2025년 퓰리처상을 거머쥔 화제작이다. 더불어 유니버셜 픽처스에서 영화화 계약까지 체결되어 머지않아 스크린에서도 만나게 될 예정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 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2부와 3부에서는 원작을 비틀어 에버렛만의 시선을 펼친다. 따라서 1부는 원작과 2~3챕터씩 교차해 읽으면 보다 선명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 줄거리는 원작처럼 각자의 사정으로 집으로부터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단순히 짐의 본래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훨씬 깊은 의미를 품는다. 영어권에서 제임스는 흔히 어린 시절의 친근함과 귀여움을 담아 짐이나 지미라 부른다. 그러나 이 애칭이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까지 고착된다면 그것은 친근함이 아니라 정체성의 축소로 변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짐은 자유를 얻고도 끝내 짐으로만 남지만, 이 작품 속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 제임스라 선언하며 주체성을 확립한다. 그 순간 독자는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미 밝혔듯이 이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침묵을 요구받은 짐에게 모든 발언권을 준 작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작의 짐이 가진 생각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독자가 알아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을 뿐.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목소리로 진행되어 노예 짐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가진 어른으로서의 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노예이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을 품을 수 있으며, 관대함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드러낼 수 있다.



이 작품 속 짐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판사의 서재에서 철학서를 몰래 훔쳐 읽기도 한다. 물론 이런 설정은 시대적 사실성과 맞지 않아 일부 독자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연민의 대상으로만 이해되던 인물이 철학적 언어를 던지는 순간 그 간극은 시대적 이질감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거리를 좁히는 경험으로 변한다. 즉, 이 장치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현대 독자에게 짐을 더욱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에버렛의 기묘한 장치로 기능한다.



작품 속 예로 헉은 짐에게 알라딘 램프의 지니에게 빌 소원에 관하여 물어본다. 이때 당연하게 가족과의 만남과 자유를 요구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두려움으로 소원 빌기를 거부하며 '철학자 키르케고르라면 무슨 소원을 빌까?'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 순간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짐의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먼저 여러 부분에서 키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그가 왜 이 철학자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살핀 후 소원 빌기를 거부한 이유를 알아보자. 



키르케고르는 실존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인간의 불안과 선택, 그리고 신 앞에서 홀로 서는 단독자를 강조했다. 짐이 이 철학자에게 매료된 까닭은 노예라는 신분으로 늘 불안 속에 놓여 있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바꿀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감히 빌 수 없는 상황은 키르케고르가 말한 불안과 도약의 문제와 겹쳐진다. 따라서 소원을 거부한 그의 태도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존재가 선택 앞에서의 불안을 드러낸 것이다.



또 다른 장치로 짐은 겉으로는 백인들이 강요한 흑인 방언을 흉내 내지만, 내면 서술에서는 정제된 언어와 사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의 이중 구조는 언어 권력의 힘을 말한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박탈하는 것은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사회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챙길 수 있는 첫 단계를 거세하였다. 에버렛은 원작에는 없는 언어의 이중 구조 장치를 도입하여 발화 권력의 불평등을 드러내고 백인들의 편의로 지워졌던 평등을 작품 속으로 불러온다.


에버렛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질문은 노먼과 또 다른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먼은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다른 인물은 백인 어머니에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은 모두 백인의 외형을 지녔다. 두 사람 모두 백인의 외형을 지녔지만 전자의 경우 자녀 역시 변명할 여지없이 노예가 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어머니의 노력에 따라 완벽한 백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흑인이기에 인간이 아닌 노예라면 같은 외모를 지닌 백인은 그 뿌리를 모를 때 어떻게 인간과 노예로 나눌 수 있는가?



이를 노먼이 완벽하게 재연한다. 그도 도망자인 노예 신분이지만 그는 다른 주에서 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 다른 인물은 자신의 주에서도 다른 주에서도 언제나 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 저자는 이 아이러니를 통하여 피부색에 따른 신분제의 허상을 고발한다. 또한 노예제의 폭력성이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을 구분하는 시선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역사 속에 묻힌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다름의 시선으로 폭력을 느끼는 존재는 현대에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2025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단순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에버렛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장치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넣음으로써 작품을 19세기에서 21세기로 불러내고, 그 결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장을 내민다. 말로는 다양성을 외치면서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과 멸시가 이어지는 현대 사회는 노예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차별에 대한 메시지는 충격적이게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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