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에서 도서를 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루공가의 치부는 제목만 보았을 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때 치부는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부분이 아니라 재물을 보아 부자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제2제정기의 작은 도시 플라상을 배경으로 한 가문이 어떻게 사회의 각 계층 속으로 스며들고 정치와 권력, 이상과 타협, 욕망과 파멸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에밀 졸라는 이 가족의 연대기를 무려 스무 권으로 엮어 루공-마카르 총서로 출간하였다. 루공가의 치부는 이 장대한 서막을 여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델라이드 푸크는 농부 루공과의 관계에서 피에르, 거지 마카르와의 관계에서 앙투안과 위르쉴을 낳으며 루공-마카르 가문이 시작된다. 온갖 약은 수를 써서 피에르는 어머니의 전 재산을 자신이 가져가고, 군대에 갔다가 이를 알게 된 앙투안은 이를 갈면서 복수를 꿈꾼다. 정체되어 있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인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피에르는 법대를 나온 큰아들 으젠의 도움을 힘입어 정치적 성공을 통하여 부를 쌓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자식과 아내에게 빌붙어 살던 앙투안은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아 여전히 형에게 대한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보기보다는 형과 반대편에 서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 과정에서 루공과 마카르의 피를 절반씩 받은 실베르는 여자 친구인 미에트와 함께 혁명에 몸을 던진다. 이들이 품은 이상은 끝내 어디에 도달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 보시길!

이 작품은 인간의 유전학적 조건과 사회 구조의 관계를 문학적으로 실험한 작품이다. 정신 질환을 가진 아델라이드 푸크를 기원으로 삼아 그 자손들이 어떻게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분화되고 파멸하거나 권력을 장악하는지를 장대한 서사를 통해 정밀하게 추적한다. 이 실험의 진행자는 작가이지만 그의 분신인 파스칼을 창조하여 독자에게 다가온다. 정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보다는 과학 실험을 한 계통도에 가까워 여느 소설과 달리 보고서로 읽히는 특징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아니었다. 책장을 넘기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언제나 단어, 색상, 배경 묘사였다. 이것들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작가가 독자에게 미리 던지는 결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시 첫 장을 펼치게 만드는 마력을 뿜어낸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에밀 졸라의 독특한 필력이었다. 그는 사건보다 장소, 대사보다 명사, 감정보다 지형으로 독자에게 단서를 던진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이 부분을 얼마나 찾느냐에 따라 작품의 밀도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울거리는 망토는 애정의 절정처럼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매장의 은유로 작동한다. 노동으로 굳어진 노동자의 손이 단단하게 달려 있다고 하는 부분은 신분의 고착화를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주검들의 평화 속이라는 것은 그동안 이곳에 대량 학살의 혁명이 없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며 그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나폴레옹 1세가 정권을 잡기 전 프랑스 대혁명과 지금의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는 2월 혁명의 대치도 보인다.

이런 방식은 색과 공간의 배열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란색은 피에르의 거실과 자스 메프랑의 들판에서 반복되며, 부패한 질서와 병든 번영의 상징이 된다. 붉은색은 실베르가 속한 저항의 색으로 이상주의자들이 품은 생명력과 동시에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함축한다. 그리고 흰색 손수건은 포플러 나무가 잘려 나갈 때 공화파가 보여주는 애도의 신호로 등장하며 절망과 체념, 상징의 종말을 암시한다. 졸라는 색채를 통해 인물의 계급과 정치적 입장을 구분하고, 단어 하나하나에 사회 구조의 기호를 심는다.

그 상징은 특히 나무의 은유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느릅나무는 과거의 왕당파, 플라타너스는 질서당(보나파르트주의), 포플러는 공화파와 급진 공화주의를 상징한다. 느릅나무는 베이고, 플라타너스는 심어지고, 포플러는 밤에 몰래 독살된다. 그중 포플러는 노동자들의 모임 장소이자 이상주의의 상징이었고 이 나무를 펠리시테가 제거하는 장면은 단순한 식물 제거가 아니라 정면충돌 없이 이념을 말살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작가는 자연의 묘사 하나로 다양한 정치 성향과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연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유독 인상 깊게 만든 또 하나의 독해 방식은 DNA였다.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가족관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감정, 도덕성, 행위 방식까지 유전된다. 실베르는 정신적 우성인자를 모두 받은 것처럼 이상과 질서를 중시하고, 미에트는 운명적 열성인자가 응축된 존재로 그들이 받은 DNA답게 산다. 루공-마카르 총서 서막의 시작인 이 책에서 아델라이드의 DNA가 농부 루공과 섞인 결과와 거지 마카르와 섞인 결과를 구분하여 그 후손의 성향을 따져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포인트로 작동한다.

루공가를 지배하는 구조는 철저한 모계 사회다. 아델라이드는 모든 것을 낳았지만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는 창조자이면서 통제 밖의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신화적 모성 가이아 혹은 성모 마리아의 위치에 가깝다. 졸라는 이야기 곳곳에 동물 가죽, 키클롭스의 도시, 바벨탑 같은 신화적 기호를 심는다. 이들은 모두 혁명과 욕망과 몰락의 전조로 기능하며 과학적 사실 위에 은밀하게 신화를 얹어놓는다. 이 작품은 신화를 모티브로 인간의 핏속에 흐르는 운명을 추적한 실험이다.

루공가의 치부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거대한 연대기의 구조적 기반이 된다. 작가는 혈통, 계급, 정치, 욕망을 유전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내며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생물학적·사회학적 조건 위에 올려 실험한다. 또한 은유와 색채, 공간과 신화를 조합해 독자에게는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스무 권의 총서를 하나로 엮어주는 첫 권은 전체 서사의 토대를 닦는 것이므로 목로주점, 제르미날 등을 읽은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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