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을 보며 어르신들의 글이 세상에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용히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들을 약자로, 은퇴자로 치부하지만 나에게 그들의 말에서 개인적 언어를 걷어내면 시간이 덕지덕지 묻은 지혜가 한가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구십의 세월이 전하는 인생 수업이라는 부재를 달고 출간된 김욱 작가의 문이 닫히면 어딘가 창문은 열린다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저자는 올해 세월의 지혜를 가득 담은 여든여덟 살이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집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리며 서울대를 진학하여 내로라하는 언론사에서 일한 사람이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닫힌 마음으로 사느라 쉰 살에 아들을 보았으며 이 늦둥이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제주도 백화점 사업에 투자하였고, IMF로 인하여 사업은 중단되고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갔다.
살 집이 없어 타인의 묘지기로 생활 공간을 마련한 그는 먹고살기 위하여 번역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나이 스무 살에 꿈꿔온 소설가로서의 꿈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공모전 1차에 합격해 2차를 앞둔 상황에서 6·25가 터져 소중한 꿈을 접어야 했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성향상 소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시작한 것이 쇼펜하우어에 관련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철학을 평생 연구하지 않은 그에게 세상은 냉혹하기만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으며 왜 자신의 글을 채택해 줄 수 없는지 자존심을 굽히고 물어보게 된다. 그 결과 작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대중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서른 곳이 넘는 출판사를 전전하면 얻어낸 답변에 보는 눈이 없다며 화를 내기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한 그는 기어이 꿈을 이루고야 만다.
그는 더불어 사는 삶, 자식과 부모, 부부 관계, 삶의 도전을 향하는 자세, 주체적인 삶, 인생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 현재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청년의 냉소·허무주의를 대하는 자세, 제대로 죽는 것 등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진솔하게 그려냈다. 곧 아흔이 되는 분이 이 땅에 태어난 청년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에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사실 읽으면서 너무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많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소개를 해야 할지조차 잘 모르겠다.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그의 글을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삶에 적용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는 말한다. 나누어야 하며 공생해야 한다고. 그래서 슬그머니 쳐든 이기심을 꾹꾹 눌러서 발로 밟고 몇 가지 소개하며 느낀 점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펭귄 이야기이다. 저자는 조류인 주제에 단순히 날개만 잃은 것이 아니라 하늘임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펭귄이 가장 싫은 동물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펭귄이 선택한 바다가 그들의 하늘일 수도, 그들의 날갯짓은 헤엄으로 바뀐 것이며 어쩌면 바다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 그들만의 하늘인 바다로 날아오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오히려 그들의 하늘을 자신만의 편견으로 한정 지은 것에 미안해하였다.
사람도 모두의 하늘이 나의 하늘은 아니라고 한다. 저자와 같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하얀 종이 위가 하늘이며, 만년필이 날개이며 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자신의 날갯짓이라고 고백한다. 그간의 내가 걸어온 세월의 흔적을 돌아보며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좋은 대학이, 대기업이, 부가 하늘이라는 세상의 언어에 그런 줄만 알고 그것만이 날아갈 공간으로만 알고 지낸 시간이 아까워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라도 깔끔하게 수긍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두 번째는 타동사에 관한 저자의 고백이다. 타동사는 문장의 주어를 구현시켜주지 않는다. 나는 돈을 번다에서 번다라는 타동사는 행위의 주체인 나는 완벽하게 밀어내고 행위의 목적이 되는 대상만을 끌고 가는 정체성을 가진다고 한다. 목적은 스스로를 분열시키며 이 과정에서 자신은 축소되고 개성은 사장된다고. 돌이켜 보면 이렇다 할 결과는 내놓지 못했으나 결국은 나의 인생도 자동사가 아닌 타동사의 삶이었음을 깨닫게 되며 꽤 입안이 썼다.
끝으로 톨스토이의 끝을 보며 저자는 닮고 싶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톨스토이의 마지막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다룬 적이 있어 더 공감이 갔다. 그의 말년은 죄책감과 재산에 미친 가족들의 감시 속에서 살았다. 그 결과 어느 날 몰래 주치의만 데리고 가출을 한 후 얻은 폐렴으로 모 기차역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를 두고 저자는 자기 타살이라고 명명한다. 요양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사신의 손짓만 기다리는 끝과 자기 타살 사이에 많은 상념에 잡히게 한 에피소드였다.
김욱 작가의 구십의 세월이 전하는 인생 수업, 문이 닫히면 어딘가 창문은 열린다는 생각보다 독특한 책이었다. 일생 전체를 두고 기술하고 있어 독자의 현재 처해진 상황에 따라 큰 파도로 다가오는 부분이 꽤 다르기 때문이다. 자식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 실패의 쓴맛에 내일의 태양이 싫은 사람, 행복하지도 않은 현재이지만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다음 장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사람, 부부간의 문제로 가슴에 돌이 얹힌 것 같은 사람 등등 누가 읽어도 작은 실마리 하나는 반드시 찾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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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