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과 국경
cky4123 2024/01/09 21:51
cky4123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인삼과 국경
- 김선민
- 19,800원 (10%↓1,100)
- 2023-11-24
- : 799
이 책은 바로 만주일대에서 청과 조선과의 국경을 중심으로 외교 및 또한 토산품인 인삼을 둘러 싼 줄다리 및 이익 둔 무역과 월경 다룬 책이라 할 수 있다.
국경문제 시작점은 건주여진 시절부터 만주가 바로 조선보다 인삼의 생산 중심지였고 병자호란 전부터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불법월경을 통해서 인삼을 채취해 간 인삼 불법 채취는 영조 때 까지 조선과 청의 골칫거리였고 인삼이 곧 청과 조선의 국경을 둘러 싼 경계를 짓게 된 것이다.
놀라웠던 점은 조선이 세종대왕부터 4군 6진 개척 후 백두산을 우리 영토로 인식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르게 백두산을 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한 게 영조 때 부터고 이때에도 조정대신 지방관들은 백두산을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고 붙어 있는 강역으로만 보았다는 것
강희제가 예수회 선교사들과 같이 지리측정기로 지역을 탐방 측정 후 국경을 정할려고 했지만 낯선 서양인 반감이 심할 것이란 예상에 묵덩이란 대신을 파견해 조선과 같이 백두산 지역을 둘러보고 세운 경계비석이 알려진 백두산 정계비 이 비문의 토문강을 흐르는 기점으로 국경을 삼는 것을 청은 압록강을 조선은 송화강으로 해석하며 논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국경봉쇄 및 초소 세우지 않았다. 이후 건륭제 역시상경장군 및 청 대신들의 압록강 유역에 초소 국경수비 강화해야 하는 주장에도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초소설치 둔전 개간을 허락하지 않음으로 번국 조공국 조선의 편을 들어준 것은 상국 청의 체면 및 황제의 권위 세워 굳이 조공 책봉 관계 원만한 조선이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란 해석이 크다.
19세기 이르러 만주산 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면서 청의 재정수입 절반인 인삼의 역활도 축소 아편전쟁으로 서구의 침략으로 청이 혼란 및 국력이 쇠퇴하면서 이 때부터 조선의 세도정치 가렴주구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대거 금지된 국경 만주로 모여서 살기 시작하게 된 봉금령 해제로 만주가 개척되기 시작 국경확충 이주민 문제 및 국경을 정하고자 위란스카이 김윤식 회담에서도 석을수 경계로 할 것이냐 두만강 경계 할 것에 의견대립으로 국경확증을 우리 손으로 하지 못했고 의화단의 난 청일전쟁으로 열강들의 침략에 청의 혼란 및 붕괴 직전 오고 러시아가 북만주 철도 및 뤼순과 다렌 차지하면서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보내 간도를 함경도 강역 편입함으로 만주 일부 차지할 기회를 을사늑약 및 청과 일제의 간도협약으로 물 건너 갔지만 이후 북한과 중국 조중변계로 백두산 절반 차지하게 되면서 백두산 일부라도 우리 영역으로 인정 받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중외교 관심 및 만주를 둘러 싼 외교 좀 더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