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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차님의 서재
  •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
  • 손준호
  • 9,500원 (5%500)
  • 2022-08-10
  • : 32
악어

백화점 층과 층 사이, 발목이 사라지는 늪
밤새 붉은 눈 번뜩이며 너는 늪에 웅크리고 있지

도시의 건기를 건너가는 바겐세일
두두두 누 떼같이 몰려오는 구두들
너는 입맛 다시며 오르락내리락, 늪을 어슬렁거리겠지

가죽은 질긴 게 명품이거든
그거 알아, 얼룩말 무늬가 지문처럼 다 다르다는 거

지름신 모시는 종족은 카드를 제물로 바친다지
꺼억꺼억, 영수증을 토해내는 체크기
마네킹의 머리통은 어디로 증발했을까
의심의 꼬리표를 바꿔 다는 쇼윈도의 가방들

근데 나는 아무래도 나의 짝퉁인 것 같아

세렝게티의 싱싱한 햇살을 만지고 싶어
거죽뿐인 쾌락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졌어
털 뽑힌 오리들은 비상구를 비상할 수 있을까

그거 알아,
사람의 눈동자에도 까마득한 늪이 있다는 거
눈물 속에도 무릎 꺾이는 계단이 있다는 거
그 계단으로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거

어쨌든 지금은 바겐세일
목숨을 흥정한다면 남은 생은 얼마를 쳐줄까

욕망의 이빨 번뜩이며 스르르 늪으로 꼬리 감추는,

* * *
백화점 층과 층 사이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를, 늪을 어슬렁거리는 ‘악어’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형태와 속성의 유사성에 기인한 것이지만, 라코스테 상표이기도 한 ‘악어’가 물질주의 세태나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유의 온당성 및 적절성을 담보한다. “지름신 모시는 종족은 카드를 제물로 바친다”는 표현은 또 어떠한가? 과시적 소비 성향을 여지없이 비판하고 통렬히 풍자하고 있지 않은가? 또, “의심의 꼬리표를 바꿔 다는 쇼윈도의 가방들”을 통해 수입 명품에 현혹된 현대인의 허영주의를 꼬집는다. 아울러, 짝퉁을 좇다가는 짝퉁 인생으로 살 수밖에 없으며, 늪에 빠지거나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다고 스스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러한 자아 반성과 성찰의 태도는 궁극으로 “목숨을 흥정한다면 남은 생은 얼마를 쳐줄까” 하고 물질만능주의를 날카롭게 풍자함으로써 생명존중의식을 한층 일깨우는 것이다. ― 장하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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