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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축제처럼 소설과 영화가 감독과 작가의 의논하에 같이 쓰여진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소설과 영화 축제는 사뭇 같으면서도 또 사뭇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딘지 모자란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감독과 작가가 의도하는 것부터가 다르다. 소설의 경우 아무래도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보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모시지못한 죄스러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잇다. 하지만 영화는 죽은이를 보내는 장례식장의 질펀한 잔치분위기, 그리고 그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특히 지식인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는데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로 인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준섭의 캐릭터도 영화와 소설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속 준섭은 짜증나리만치 속물근성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때까지 그의 표정과 행동에선 전혀 슬픔이 느껴지지 않고 친구들을 대접하고 유명한 평론가를 모시는 등의 행동에선 노모의 장례식을 자신의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여기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에 반해 소설에서 준섭은 늘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죄스러움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효자로 등장한다. 영화를 먼저 보아서인지 그런 준섭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고 소설에서 여러번 되풀이된, 자신을 매정히 떠나보낸 어머니의 손사래짓 이야기도 준섭의 자기 합리화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영화 축제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또 한명의 인물은 바로 용순이다. 영화속 용순은 너무 밋밋하다. 소설속 개성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소설에선 분명 용순에 대한 여러기억과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삼촌(준섭)에 대한 원망이 많이 그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속에선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였다. 영화만을 보았을 땐 용순이 준섭을 미워하는 이유가 단지 과거에 돈을 빌려주지 않아서라고 느껴질만큼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다. 어쩌면 용순을 표현하기엔 그동안의 고전적인 오정해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축제를 읽은 사람들이 책이 잘 안 읽혀진다, 책장넘기기가 힘들었다는 말들을 한다. 아마도 중간중간 이야기의 흐름을 깨며 등장하는 감독님께 보내는 편지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영화와 소설이 같은시기에 제작된 특별한 경우라지만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면서까지 꼭 작가 이청준이 개입을 해야했을까?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임권택화된 자신의 시각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의도된 장치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편지가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영화속에서 이 소설속 편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동화의 장면이다. 소설처럼 영화전체를 보는데에 불편함을 주지는 않지만 '효'라는 주제를 현실의 '죽음'과 대비시켜 너무나 뚜렷이 드러낸다. 뽀샤시한 화면, 배경음악, 그림으로 그린 배경등으로 현실의 장면과는 너무나 다르게 표현되어 어떤 괴리감마저 들게 만든다.

영화 축제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사망부터의 장례과정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하나하나 자막까지 넣어가며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도시에서 영화에서와 같은 장례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나 젊은 층들은 그러한 전통적 장례가 많이 생소할 것이다. 나같은 경우도 이 영화를 보며 단순히 곡을하고 상여를 메는것만이 다가 아닌 우리의 장례문화를 간접적으로 나마 접할수 있었고 또 장례절차를 알 수 있어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영화의 촬영장소가 실제 작가 이청준의 시골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속에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사실은 똑같은) 시골집과 동네 풍경에 영화보는 재미를 한층 더 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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