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가서 소고기를 잔뜩 구워먹었다. 남편은 소고기랑 같이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평소에는 맥주만 두 병정도 마시는데, 오늘은 소주까지 시켜서 소맥을 만들어 마셨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은지 오다가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사주고, 집근처 카페에서 카푸치노도 사줬다. 아이들에게는 생과일주스를 사줬다.
살금살금 비가 오고 있었다. 매화나무엔 작게 꽃망울이 맺혀서 얼핏 보면 빗방울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봄이 왔다. 아마 어딘가에는 벌써 민들레가 피었을 거다. 작년 3월 14일,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첫 민들레와 딱 눈이 마주쳤었다. (난 매년 첫 민들레를 본 날을 기록해 놓는다.) 그보다 4일이 더 지났고, 오늘 비가 내리니 잘하면 이번 주 안으로 민들레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벙긋 좋아졌다. 이렇게 쉽게 기분이 좋아지는 건 뱃속에 든든한 소고기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배속 중간쯤에 소고기가 걸쳐져 있다. 뱃속에 있는 든든한 소고기를 느끼면서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 조금 읽었다. 뭔가 소고기를 잔뜩 구워먹고 온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소고기를 구워먹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알라딘 서재에 다시 또 오랜만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정말 어쩌다 한 번씩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제대로(?) 리뷰를 올리거나 한 건 거의 4년만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나는 작은 마을공간에서 1년간 일을 했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일을 그만두었다. 그 공간은 실무자로서는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지만 이용자이자 활동가로 보낸 시간은 거의 10년인지라 일을 그만두고 나니 허전함이 밀려왔고, 그건 마치 헤어진 첫사랑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를 다시 재정비해야 했다. 10년의 인연을 이어왔던 공간, 또 그 공간의 사람들과 연이 끊어지는 허전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내 나이가 재정비가 필요한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뭐랄까. 지금까지 살아오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자리잡고 비켜주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준비한다는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앞으로 뭐하며 살면 좋을지가 난감했다. 책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잘 읽히지도 않았다. 글을 쓴다는 건 더 어려웠다. 생각이 붕붕 떠다니기만 했다. 붕붕 떠다니는 생각을 잠재우려고 손바느질도 하고, 도예공방을 다니며 그릇을 빚고, 사계절 내내 온갖 과일청을 만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일년 동안은 그렇게 손을 움직여서 생각과 말을 지우고 싶었다. 그건 마치 낙서로 가득찬 칠판을 깨끗이 지우는 것과 비슷했다.
이제야 깨끗이 지워진 칠판을 마주한 느낌이다. 다시 칠판에 새로운 걸 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의자에 앉아 빈 칠판을 바라보며 뭘할까 궁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단은 다시 책을 읽고, 어색한 리뷰를 써보기로 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적는 조용한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중이다.
봄비가 내리고, 내 배는 든든한 소고기를 품고 있으니 책 읽기에 더없이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