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벵상 소렐/ 김희진 옮김/ 미메시스
곰이 숲에 있다. 그 곰은 동네 한 처녀를 좋아한다. 그 처녀는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려 힘들어한다. 마을 남자들은 다른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신부는 권력을 휘둘려 여자들을 농간한다.
곰이 한 남자를 덮쳐 그 남자의 얼굴로 가면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곰인줄 모른다. 말없는 바르나베씨로 생각한다. 곰은 자기가 좋아하는 잔에게 가까이 가지만 잔과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그 대신 마을 모든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참 간단한 이야기다. 남자들은 맥주집에서 신세를 한탄하고 여자들은 뜨개질을 하면서 자기들의 신세를 탓한다. 곰은 듣기만하는데 아무도 그가 곰인지 모른다.
벵상소렐은 유명한 작가다. 그가 유명한 것은 그림에 보이는 것 만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프랑스 만화는 철학적이라고 한다. 그 만큼 그림 외에도 생각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생각할 것이 많다. 우리 일상이 비툴어져있거나 투사되거나 혹은 우화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은 메타포라고 한다. 그림은 이 메타포를 잘 담고 있어야 한다. 직설적이지만 우의적으로 직관적이지만 투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곰, 늑대, 돼지는 어린이 그림책에 많이 나오는 동물이다.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영리하고 그런데 그 곰이 어른들의 이야기에 등장했다. 어린이들 소재가 어른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으니 당연히 어른들은 모른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세상을 다 살아봐서 모든 지혜를 가진 것처럼 착각한다.
그런 착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곰과 성적관계를 맺은 모든 여성은 만족해하고 남자들은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뒤에 가서는 욕을 한다. 자기 부인은 막대하고 젊은 여자들은 흘끗 쳐다본다. 자식에게 가장 힘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술자리에서 술이 취하면 어리광을 부린다.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허구헌날 술만 먹어댄다며 타박한다. 그리고 모여서 뒷담화를 한다. 어느 한 구석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동물같은 원초적인 것에 욕구를 채우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어느 한 남자가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들은 자기들의 불행을 모두 바르나베 탓으로 몰아버린다. 희생양이다. 역사가 그랬다. 말이 없는 사람, 가장 아무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덮씌운다. 그는 말하지 않으니까 그는 이렇게 해도 군 말이 없으니까 그리고 정체를 밝힌다.
이야기 끝은 곰이다. 곰이 잔을 만났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곰만이 남자와 여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까
시장이 마을 사람 모두를 알고 있어서 마을 발전시키려고 시장에 나왔지만 모두에게 비웃음을 산다.
신부는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것 같지만 그의 횡포 탓에 사람들이 그가 달갑지 않다. 아니 어쩌면 다 아는 비밀이다.
그런데 곰은 존경도 사랑도 인정도 받지 않았던 바르나베씨였으니 남자도 여자도 이말 저말 이 행동 저 행동 한 것이다. 약한자에게 모든 것으로 보여도 괜찮다 생각하는 위계관계는 봉건시대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드라마 속에도 늘 상보인다. 그게 바르나베이고 그게 곰이었다. 그 본질을 들킨 이야기는 덮으면서 애잖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