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에게 하늘나라를 묻다/전원/생활성서사
전원신부님을 알게 된 것은 오타와에서 만난 젊은 한인 가족 탓이다. 몇 년 전 코로나 전에 갔을때는 둘이었는데 이제 셋이 된 가족 탓에
코로나는 우리 세상을 또 다른 차원에서 보게 한 것은 분명하다. 비대면, 1,2,3차 예방 접종,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진단키트, 신속항원검사, 그리고 확진자 어느 순간 확진자가 되지 않으면 미래 확진자로 살아야 하고 한번은 걸려야 끝날 것 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 속이다.
그전 세상은 예수 탄생 전과 탄생후로 나뉘었고, 다시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신부님의 글돌 단순히 복음 속 비유를 통한 에세이라면 좋았을텐데 그저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코로나로 인한 변화된 세상 틈속으로 복음을 말한다. 아무도 없는 성당, 이세상을 위해 변화되어야 하는 교회, 그리고 비대면과 일상적 거리두기, 얼마전 유현준 선생의 공간의 미래에서도 교회의 주중의 공간의 사용이 변해 세상을 위해서 그 공간을 내어주는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이 되고 모든 것이 데이터 기반 전기를 통해 얻은 자료에 기반을 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처음으로 유럽을 나갈 때 일본어에서 우리 말로 번역되 노란색 “우리는 지금 세게를 간다”였던거 흔히 “우간다”라고 불리는 책을 보고 유명한 명소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후 여행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외국에서 살면서 여행정보를 찾는 작가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도 한참을 종이지도를 얻으려고 여행안내소를 갔었다. 시간이 변해 구굴링을 하고 맛집 검색을 하는 것도 다 내 휴대폰을 통해서 한다. 그렇게 된 것이 겨우 12-3년 만이다.
그 와중에 복음의 비유는 다른 의미를 가졌을까? 사람을 따스하게 말하는 방식과 이야기는 요 코로나로 인해 변해버린 것일까?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사람이 주는 선물이다.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신춘문예에서 본 이야기라고 한다.
혼자 사는 노인이 많아서 로봇을 대량 생산했단다. 이 로봇은 노인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의식주 문제를 도와주고, 노인을 위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 어느날 정부는 이 로봇은 다 없애기로 했단다. 노인들은 그 로봇을 위해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더 외로워졌단다. 사람은 주고 받고 소통하며 사는 것이다. 울리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고 미워지기도 한다.
남을 통해 상처를 또 남을 통해 위로받고 살아간다. 세상의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바뀌었어도 사람들에게 통한 비유는 여전히 있다. 복음을 통해서 할 수 있는 말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위로를 주려고 위로를 받으려고 오랫동안 종교라는 것이 세상의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이 축소되는 순간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답을 해주는 곳을 찾는다. 대공황이 일어나면 자살이 늘고 알콜 중독이 많아질 것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말 위기가 찾아오면 나보다 다른 이를 더 배려한다.
다시 한번의 대통령 선거 어떤 이는 졌고 어떤 이는 이겼다. 이기고 지고가 아니라 져서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충분한 위로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래서 통합을 하고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 쪽편으로 우세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위한 정치로 돌아가면 위로가 없는 세상에서는 배려를 잃게 된다. 겨자씨에게 하늘나라를 묻다. 요즘 들어 제목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데 참 시적이면 비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