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녀올게.”
“예. 잘 다녀오세요.”
베젠트와 할아버지가 당분간 서점을 비우게됐다. 책을 만들어줄 인쇄소를 찾기위해서다. 사실 브리크테나에도 인쇄소가 한곳 있기는 한데 베젠트가 쓴 책 내용이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오고가는 브리크테나에서는 인쇄를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책에 관련된 일을 젊어서부터해서 이쪽으로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있어 멀지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인쇄를 부탁하기로 한 것이다.
나 는 사실 베젠트가 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지 안될지 모르겠다. 그런 내용의 글을 책으로 만들면 나중에 잘못되었을때 만들어준 사람도 화를 당할 거다. 그런것까지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해도. 혹시 모르지. 여자 입장을 잘 이해해주는 어느 멋진 인쇄공이 있을까?
두 사람이 떠나고 스코비아하고 나만 서점에 남았다. 베젠트는 우리가 글을 안다는걸 알지만 내가 알기론 할아버지는 모르고있다. 그래서 우리가 서점에 남아있다고해도 서점 문을 열지는 않았다. 내심 다행인게 나는 설마 서점 문을 열어야하는줄 알고 엄청나게 긴장하고있었다. 할아버지하고 같이 계산대를 봐도 몇몇 남자들은 나를 아주 못볼걸 본것처럼 본다. 할아버지가 있어도 그런데 나 혼자 계산대를 보면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이 된다. 우와, 이거 참 가관인걸.
“긴히야. 같이 나가서 놀 수 있겠어?”
머릿속으로 한참 상상을 펼치다가 갑자기 스코비아가 말을 걸어오자 몸이 움찔할 정도로 깜짝 놀라버렸다.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러 했지만 내가 너무 지나치게 놀랐는지 스코비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주 잠시동안 스코비아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서로 피식 웃었다.
“그런데 요즘 점점 추워지는데 나가기엔 조금 그렇지않아?”
“그래도 오랜만에 둘이만 있잖아.”
그러고보니 그런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따로 일을 했고 그 뒤에 스코비아는 베젠트와 계속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가 잠시 나갔을때도 항상 베젠트와 같이 있었으니까 서점에 우리 둘만 있는건 처음이었다.
“그렇네. 우리 둘만 있는거 처음이네.”
“처음이었나?”
스코비아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히며 예전일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흩어보기 시작했다. 아, 스코비아는 방금 오랜만이라고 했구나. 그럼 예전에도 우리 둘만 있을 때가 있었나? 으음... 기억이 안난다. 내가 알기론 이번이 처음인데.
“그런건 어떻든 상관없잖아?”
“하긴 그렇네.”
왠지 이 무의미한 대화에서 뭔가를 찾아내려 잠시지만 머리를 굴린 내가 미워진다.
“어쨌든 좀 나가서 돌아다녀보자아.”
“하지만 날...”
“이럴때 아니면 언제 할 일없이 돌아다니겠어?”
날씨탓 하려고하니까 재빨리 말을 막아버린 스코비아가 살짝 미워보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서점에서 지내고부터 한가롭게 돌아다녀본적이 없는 것 같다. 예전에 리슈넬 언니 집에서 살 때는 심심하면 셋이서 돌아다니고 했었는데.
“응? 긴히야. 그래도 오늘은 별로 안 추우니까 나갔다오자. 응?”
앞뒤로 응을 붙이면서 조르니까 어째 거절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평소 잘 이러지 않던 애가 이러니까 갑자기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짦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스코비아는 방긋 웃으면서 내 손을 끌어당겼다.
막상 나와보자 아까 내가 했던 걱정만큼 춥지는 않았다.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기분좋게 느껴지는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우리끼리만 맛있는 것 좀 먹어보자.”
스코비아가 손에서 누런 동전 몇 개를 튕겼다.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돈주머니. 그 엄청 큰 은색 개가 나한테 줬던 그 돈주머니가 생각났다. 왜 갑자기 생각나는거지.
“스코비아.”
“응? 추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돈주머니 아직도 거기에 있어?”
“아, 그거. 아직 거기있지.”
스코비아는 입술을 삐죽내밀며 싱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평소에는 잘 가지않았던 브리크테나의 여러거리들을 돌아다녔다. 시장거리는 항상 찬거리 사러 다녔었기 때문에 가지않았다. 그래서 시장을 제외하면 브리크테나에서 먹을 것을 살 곳이 그렇게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서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을 걷다보니 어느 사이 주변에 칼을차고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와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를 걷고있는 우리는 여름에 오는 눈처럼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스코비아도 나처럼 상당히 당황한 것 같다. 우리가 막 태어난 동물같이 당황한 것 처럼... 이 표현이 적절한가? 이상한 표현을 남발하지 말자. 어쨌든 그런 것같이 주변을 둘려보며 걸을 때 칼을 찬 험상궃은 남자들도 우리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다. 아니 그것보단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우리보다 키도 훨씬크고 몸도 좋은 사람들 속을 돌아다니자니 괜시리 주눅이 들고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겠다. 으, 저기 저 수염 아저씨는 왜 저렇게 째려보는 거야.
“여기 너무 무섭다. 빨리 나가자. 스코비아.”
“괜찮아. 저 사람들이 뭐 볼게 있다고 우리한테 신경쓰겠어?”
의외의 대답에 ‘응?’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스코비아는 보통 때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있었다. 이 날카롭고 차가운 거리에 벌써 익숙해졌다는 말인가? 얘는 아무래도 적응속도가 보통 사람보다 비정상적으로 빠른가봐.
나는 최대한 그곳에 있는 사람들하고 눈이 마주치지 않게 거의 바닥을 보고 걸었다. 짧은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남자들하고 얼굴을 마주한다는것은 나에게 불가능했다. 왜냐면 그 남자들은 몸에 근육도 많았고 나보다 키도컸고 여차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스코비아 말에 따르면 괜한 걱정이겠지만.
“그러고보니 방금 거기 남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도 있더라?”
막 그 거리를 빠져나오자 스코비아가 하늘에 대고 말했다. 여자도 있었구나. 그런데 그런 남자들 틈에 서있는 여자라 상상이 안간다.
“몇살로 보였어? 그 사람도 칼차고 있었어?”
“음... 베젠트 언니하고 비슷하던거 같던데. 칼은 남자들보다 작은거 가지고있더라.”
“그런데 그 사람들 칼은 어디다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거지?”
스코비아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연거같았는데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내가 착각한 건가? 느낌상으로는 분명 뭔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우 리는 한참을 걸어서 강 바로 옆에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은 사람이 몇백명은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였는데, 그 넓은 바닥은 모조리 네모난 우유빛 돌로 깔려있었다. 거기에 바닥 뿐만 아니라 외곽에 놓여있는 의자나 장식들까지도 모조리 우유빛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가한 점심 때라 그런지 광장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후아, 스코비아. 좀 앉아서 쉬자.”
스코비아도 오랫동안 걸어다니느라 지쳤는지 별말없이 ‘응’하며 수락했고 우리는 근처에 있던 우유빛 돌의자에 앉았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머금고있던 돌의자는 무례하게 얼굴에 엉덩이를 들이댄 우리들을 그 온기로 기분좋게해주는 관대함을 선사했다. 하릴없이 저 앞에 보이는 작은 강을 보고있자니 강가에 난 길다란 풀사이로 노다니는 몇 마리의 작은 강아지들이 보였다. 강아지, 개...
“그건 누가 준 돈이었을까?”
“응?”
“우리가 지금 가지고있는 아니 우리 방에 있는 돈 주머니. 그건 누가 준거지?”
“그 때 그 커다란 늑대가 줬다고 했지?”
“늑대?”
“응. 늑대.”
“늑대가 어떻게 생긴거더라?”
“개하고 비슷한데 더 무섭고 큰 게 늑대아니야?”
아, 그러고보니 그건 개라고하기에는 너무 컸었지. 보통 개처럼 같이 놀 수 있을 분위기도 아니었고. 늑대란건 책에서만 살짝 읽어본거라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설마 그게 늑대였을 줄이야. 늑대라, 그런데 늑대라도 그렇게 클리는 없을 거 같기도 한데.
“그런데 긴히야. 그 돈을 누가 줬는가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그 돈을 왜 줬는가가 중요한거 아닐까.”
“그냥 우릴 거기에 놔두고가기엔 양심에 찔려서 준거 아닐까?”
하지만 말하는 도중에 엄청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버렸다.
“늑대가? 얘는 농담도.”
으,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 나는 왜 항상 실없는 얘기를 해서 이런 반응을 끄집어내는거지? 좀 더 생각하고 말해야겠는걸.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스코비아는 바로 말하지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순간 갑자기 스코비아가 할 것 같은 말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얘라면 아마 이런 말을 할 것 같아라고 내 머리가 마음대로 상상해댔다.
“그 돈 나중에 큰 일하는데 쓰고싶은데 어때?”
“큰 일?”
스코비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책을 하나 쓸거야.”
들으면서 나름대로 충격 비슷한 것을 느낄것 같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느낌도 나지않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오히려 나한테 조금 놀랐다. 아마도 예전에 베젠트가 책을 쓰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글을 알고있는 한 사람으로서 책을 쓰고싶다는 생각을 해봤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책?”
“어떻게든 좋은 책.”
스코비아는 여전히 하늘을 보면서 간단하게,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도 하늘을 올려봤다. 태양은 머리 뒤에 있었고 앞에는 작은 조각구름 하나가 바람에 실려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나도 간단하게 말했다.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