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리넨의 서재

스코비아는 땅거미가 내릴 즈음에야 돌아왔다. 베젠트가 방에서 나온뒤에 할아버지는 외출했고 그 뒤 쭉 함께 계산대를 지키고있었다. 스코비아는 들어오자마자 눈을 동그랗게뜨며 “어?” 소리를 냈다. 베젠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왼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아수 만나러 나갔었다며? 만났니?”
“아, 예.”
“뭔 얘기했어?”
“요근래 언니 얘기를 좀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 정도를 물어봤어요.”
“그래... 미안해. 나땜에 네가 괜한 고생했네.”

베젠트가 짧게 작은 한숨을 내쉬며 쌉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스코비아가 당황해서 손을 막 내저었다.

“아, 아니예요. 그냥 제가 그러는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한거라서.”
“아니야. 고마워.”

베젠트는 싱긋 웃었다. 스코비아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채 어쩔줄 몰라했다.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는건 뭔 이유야?

“에... 아수씨가요.”
“아냐. 됐어.”
“예?”

스코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동시에 베젠트를 쳐다봤는데 똑같은 표정을 했을것같다.

“굳이 얘기한걸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스코비아.”
“예.”
“나 오늘은 서고에 있을테니까. 스코비아는 긴히랑 여기있어.”
“어? 오늘 벌써 밤이 다 됐는데요?”

잠자코 듣고만있기 뭐했는지 나도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말을 속으로 밀어넣는 연습을 좀 해야겠는데?

“그렇긴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이 개운해져서. 이런 날엔...”

베젠트는 말끝을 흩트리더니 그냥 씩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언니, 아수 오빠가 그날 일은 정말 미안하대요.”

베젠트는 들어가면서 조용히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의 듣지못했지만 의미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래?”
“누가 그런거 모르나... 라고 한거 같은데?”
“하긴... 모를 리가 없지.”

스코비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난 그 때 그 표정에서 왠지 모르게 할아버지같은 연륜을 느낀것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그 느낌은 사라졌다.

“그나저나 너 아수씨하고 뭔 얘기했어?”
“그냥 그 날 뭔 일이 있었는지하고 언니 어제까지 있었던 거 그대로.”

별로 특별한 얘기는 안한것 같다. 아니, 특별한데 내가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베젠트는 좀 불안하긴해도 예전처럼 돌아온것 같으니까 괜찮은건가? 아수씨는 서점에 언제 다시 올까?




아침에 베젠트가 방으로 들어오는데 얼굴이 심하게 초췌해서 놀랐다. 베젠트는 천천히 들어오더니 이불 위에 쓰러지듯 누우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 썼다...”
“예? 뭘요?”
“책...”

그러더니 순식간에 세상모르듯 잠에 빠져들었다. 흔들어볼려고했는데 스코비아가 소리 지르는 입모양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장난인데 너무 과잉반응하는거 아니야? 라고 속으로 투덜대려니 스코비아가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기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르켰다. 우리는 아무말없이 그대로 방에서 나와 서고로 들어갔다. 아침에 서고들어가는건 처음인것 같다. 평소보다 싸한 공기가 가슴을 파고드는게 색다른 기분이야. 평소 베젠트와 스코비아가 작업하는 책상으로 걸어가자 높게쌓인 반듯한 종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예전에 봤을때는 저 정도로 쌓여있지 않았는데?”
“쓴 건 보통 상자안에 보관했거든. 저렇게 놔둔걸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나봐.”
“엥? 뭐하러 읽어?”
“검토해야지. 검토.”

스코비아가 검지를 흔들면서 살짝웃으며 혀를 찼다. 이런 스코비아를 보고있으면 왠지 주눅이 든다.

“좋아. 나도 읽어볼까.”
“어? 너도?”

스코비아는 팔을 걷어붙이고 자기 책상에 앉아서 윗종이 한 장을 꺼내읽기 시작했다.

“이래뵈도 조수니까. 나도 봐야지?”
“그럼 나도 보자.”
“어? 너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정말 신나게 웃었다.




" 후우-"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위로 치켜드니 목에 뻐근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정신이 나갈정도의 아찔함을 느꼈다. 눈앞이 한순간 보이지않았다가 서서히 보이게되면서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는걸 깨달았다. 계산대를 봐야하는데 나가봐야 하는데 나가고싶지 않다. 그냥 잠시 이대로 앉아서 오랜만에 머릿속을 헤엄쳐보고 싶다. 아니 이미 그러고있다. 가만히 있기만하기 심심해서 콧노래를 불려보기 시작한다. 흐응~흠흠 흠흠흠~ 이런 기분 얼마만이지? 한참 그러고있다가 스코비아를 보려고하니까 자리에 없다. 언제부터 없었는지 알수없지만 지금 스코비아가 있고없고는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건 음... 고마워, 베젠트.


그 날밤, 베젠트는 한번도 쉬지않고 그대로 글을 쭉 써내려가 마침내 완성시켰던 것 같다. 그 때 베젠트가 쓴 글은 잘못 쓴 글자도 꽤 있었고 가끔가다 줄이 틀려있기까지했지만 그 내용은 아주 잘 짜여져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왠지모르게 그 때 베젠트는 감정이 북받힌 상태에서 글을 쓴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것같다. 글은 놀랄정도로 객관적이었다. 양도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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