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리넨의 서재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내가 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다. 저녁에 밥 먹을 때는 베젠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면서 대충 먹고 재빨리 설거지를 끝내고 평소에 하지도 않던 산책을 핑계로 서점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쳐있었고 길가는 어두웠다. 달이 떠 있지 않았고 주변에 불같은 것도 없어서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어느 정도 보일 때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게 참 예쁘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별에 심취할 수 있었다.

서점 근처에서 들어갈까 말까를 계속 고민했다. 들어가기가 겁났다. 베젠트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코비아가 안에 있었고 나는 갈 곳도 없었다. 책들이 쌓여있는 어두운 곳을 지나 안쪽 구석에 있는 나와 스코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생각대로 스코비아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 외로 베젠트도 있었다.

“왔어?”

스코비아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어...”하면서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을 했다.

“그럼 긴히도 왔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벽에 기대고 있던 베젠트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스코비아도 의자를 돌려 몸을 탁자에서 베젠트로 향했다.

“일단 너희들이 어떻게 글을 알고 있는지는 안 물을게.”

머릿속이 터진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죽어버린것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만은 평소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뛰고있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더 주의해야 한다는 거야. 나도 그렇지만. 하지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베젠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동료가 생겨서 기쁜데?”
“예?”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돌아다닐 때도 글을 아는 여자들은 본 적이 없거든. 어쩌다가 한두 명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날 밤에 만난 꼬맹이들이 글을 알 줄은 생각도 못했고. 브리크테나에서는 감시가 심해서 더더욱 그렇고말이야.”
“브리크테나?”
“응? 여기 이름이잖아. 몰랐어?”

아, 여기서 산지 상당히 오래 지났는데 나는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베젠트가 지금 말해주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계속 몰랐을지도 모른다.

“스코비아는 아까말한대로 내일부터 나 좀 도와주고, 긴히는 하던 대로 서점 일을 하면돼. 여태까지 해왔던 것보다 조금 더 주의하면서.”
“스코비아는 뭘 도와주는건데요?”
“자료 수집.”

베젠트는 검지를 올렸다.

“자료수집?”
“나, 책쓰고있거든.”
“에?”
“나 돌아오고나서 줄곧 서고에만 있었잖아. 거기 안에서 뭘 하고 있었겠니.”

-아마도-멍해진 얼굴로 스코비아를 쳐다봤다. 스코비아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 그냥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흐음. 스코비아. 아까 한 얘기 또 한 번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

스코비아는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젠트는 만족한 듯 살짝 웃고나서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자들은 많은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어. 그 중 하나가 글을 배울 수 없는 거고. 나는 이곳에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하고 살면서 항상 왜 여자들은 이래야 하나하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막무가내로 할아버지한테 졸라서 글을 배웠고 브리크테나 유일한 서점의 일원이라는 이점을 사용해서 나름대로 보통 여자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오고 있었고. 하지만 한계가 있었어.“
“한계요?”
“응. 대놓고 그러진 못하겠더라고.”

베젠트는 머리를 서너 바퀴 천천히 돌린 다음 말을 이었다.

“난 책을 쓰기로 결심했어. 주제는 ‘여자도 글을 배우게 해줘‘로 정했지. 글을 배웠으면 써먹어야 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책 썼다가 나쁜 일 당하는 거 아니에요?”

리슈넬 언니가 잠시 떠올랐다. 베젠트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럴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저항은 해봐야하는거 아니겠어?”

베젠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고 씁쓸한 웃음이 입에서 나왔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책 한 권 쓴다고해서 곧바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이 서점에서 일한지도 엄청 오래됐거든. 서점에는 부자나 높은 인간들만 오지. 높은 인간들 상대하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안좋은일도 생기고. 그러다가 어쩌다보니 그네들 속을 어느 정도 알게 됐어. 부잣집 여자들도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걸 지지하는 남자들도 있고. 아수 알지?”
“네.”
“아수가 날 도와주는 사람 중 한명이야.”



거리에 붉은 빛이 조금씩 들어설 때 할아버지도 돌아왔다. 뭔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가지고 오실 줄로 상상했는데 양손에 보따리 하나씩만 들고 오셨다. 할아버지는 나한테 보따리들을 맡기고 흔들의자에 눕더니 곧바로 잠이 들어버리셨다. 양손에 들린 보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 나는 그걸 들고 곧장 서고로 들어갔다. 서고 구석에서 베젠트와 스코비아가 작은 책상 근처에 있는게 보였다. 베젠트는 의자에 앉아 책상위의 종이에 뭔가를 쓰고있었고 스코비아는 옆에서 책을 한권 펼쳐 보고있었다. 둘다 내가 오는 소리를 듣자 하던 일을 멈추고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손에 들린 보따리들중 오른손 것을 들어보였다.

“언니, 이거 어떻게해요?”

갑자기 베젠트가 손뼉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돌아오셨어?”
“네. 그런데 오자마자 자고있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셔서 피곤한거야.

베젠트가 다가와 보따리를 건네받고 책상위에 올렸다. 두 개의 보따리를 푸니 예상했던대로 책이 들어있었다. 보따리 하나에 열권 정도의 책이 들어있었다. 베젠트는 그것들을 서너가지 종류로 구별했다.

“스코비아. 이거 책장에 넣어줘.”

스코비아가 “네”하며 책을 한움큼 받아들고 쭈욱 나열된 책장들 속으로 들어갔다.

“뭘로 구분한거예요?”
“제목 철자에 따라서.”

그러고 베젠트는 다시 자리에 앉아 글쓰고있던 종이를 한손으로 들어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 종이에 있는게 베젠트가 쓴다는 책일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베젠트는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그러니 나보다 대단해도 그건 당연한거잖아. 스코비아가 돌아와서 다시 책을 여러 권들고 책장들 속으로 들어갈 때 나도 서고를 나왔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누워 자고있었다. 나는 흔들의자 옆 계산대 의자에 앉아 이젠 붉은색으로 진하게 물든 길거리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긴히야.”

할아버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예?”라고 대답하며 돌아봤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자는것처럼 누워있었다.

“물 한컵만 갖다다오.”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에서 물을 한컵 따라갖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상체를 일으켜서 컵을 받아 단숨에 다 마신 다음 다시 의자에 누웠다.

“나 없는 동안 뭔 일은 없었냐?”
“아뇨, 마땅히 없었어요.”

다시 계산대 의자에 앉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하고 시선을 거리에 두었다.

“그래? 다행이군. 귀찮은 일이 생기면 골아프니까.”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그저 길거리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기만했다. 사람들 수는 점점 줄어가고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않았다. 보이는 그 장면에 취해가는 것만 같았다.

“긴히야.”

왠지 대답하기가 귀찮아서 그냥 아무말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었다.

“음... 아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 그러고보니 베젠트보다 할아버지와 생활한 게 더 오래되었지. 할아버지도 알고있을까? 귀찮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싫다.

얼레, 어느새 밖이 어두워졌다. 문 닫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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