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젠트가 왔다고해서 내 일이 바뀐다거나 하는 일을 없었다. 그건 스코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베젠트는 그 날부터 서고에 들어가 식사 때마다 나오고 어두워져야 나왔지만 잠자리에 같이 들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베젠트는 서고에서 생활했다. 스코비아가 책을 가지러 서고를 들락날락 거리니까 베젠트가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봤는데 “안 보이는 곳에 있어서 잘 모르겠는걸.” 라는 숨 막히는 대답만 했다.
가만히 있어도 졸리는 계절이 지나가고 점점 더워지는 어느 날이었다. 잠을 자다가 깨버렸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잘려고 눈을 뜨지 않았지만 머리가 계속 아파 물이라고 한잔 마시려 몸을 일으키니 탁자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 스코비아가 보였다.
“뭐해?”
“어? 깼어?”
스코비아가 날 보면서 가볍게 웃는다. 나는 탁자위에 있는 물건을 살펴봤다. 불이 켜진 촛불과 종이였다. 스코비아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연필이었다. 스코비아가 뭘 하고 있는지 금방 깨달았다.
“글 쓰고 있었어?”
“안 쓰면 잊어버릴까봐...”
일어나서 탁자 옆으로 걸어가 스코비아가 쓴 글을 보았다. 오늘 일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간략하게 또는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써서 적혀있었다.
“오늘 일들 쓰는 거야?”
“응. 생각날 때마다 간간히 썼어.”
“종이는 어디서 구했어?”
“서고 구석에 거미줄 쳐진 게 있더라. 오랫동안 안 쓴거 같아서 조금씩 잘라냈어.”
그래도 종이도 비쌀 텐데 그렇게 보관했단 말인가? 뭐, 그 큰 서고 안 보이는 곳에 그런 종이뭉치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무서워서 서고 구석구석 살펴보지는 않았구나.
물을 먹어야겠다는 처음 생각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나는 스코비아가 글 쓰는 것을 지켜봤다. 종이와 손과 스코비아의 얼굴이 촛불에 의해서 붉게 물들었다. 스코비아는 천천히 그렇다고 느리지 않게 글을 써나갔다. 스코비아는 내가 보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글을 한줄쓸때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상당히 고심해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날 이후로 글을 써 본적이 없었다. 서점에서 일하느니만큼 글을 읽기는 수도 없이 읽었지만 써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사실을 자각했을 뿐이다.
스코비아가 글을 다 써서 연필을 놓았다. 쭉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던 말을 해야 될 때라고 느꼈다. 스코비아에게서 등을 돌리고 허공에 대고 묻듯이 스코비아에게 물었다.
“리슈넬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스코비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분명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런 것을 묻는 내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거고.
“무사할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가슴 한켠이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말 무사할까? 무사했으면 좋겠다. 아무 일 없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한동안 아무 대화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스코비아에게 등을 돌린 채로 말이다. 그러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하고 또 천천히 이불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불 밖에서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스코비아도 탁자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말을 좀 더 해보려고 잔뜩 생각하다가 포기하려 할 때 스코비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살짝 내려 뭘하는지 보니 스코비아는 또 다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뺨에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밤 이후로 리슈넬 언니 얘기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코비아는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리슈넬 언니 얘기를 해봤자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괜히 우리끼리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더니 계산대에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가 되었다. 그날 밤 이후에도 나와 스코비아는 그 전과 다름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하지만 다시는 리슈넬 언니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요 근래 할아버지가 책을 구하러 서점을 비웠기 때문에 나 혼자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글을 못 읽는 나는 책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손님들이 오면 계산대 위의 종이에 책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글을 아는 손님들은-글을 못 읽는 남자들도 있었다.- 기꺼이 책 이름을 적어줬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스코비아가 확인해서 책을 내다줬다. 할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책을 가져올 때 늦게 가져올 필요를 못 느꼈는지 책을 일찍 내왔다. 얼굴을 아는 손님들이 “오늘은 일찍 받는군요.”같은 말을 하면 찾기 쉬웠다고 둘러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 찾아왔다. 전날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기어코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서점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가 땅에 부딫힌다음 서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입구 근처의 책들을 안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책더미 몇 개를 움직이고 나니 베젠트가 안쪽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베젠트는 서점 밖을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야, 오늘 날씨가 정말 좋은데?”
“비오는 거 안 보여요?”
입을 삐죽 내밀며 핀잔을 주니 무안하니 헤헤 웃는 베젠트. 그러고 보니 베젠트가 계산대에 나온 건 처음 봤다. 그 날 밤 전에는 아마도 베젠트가 계산대에 있었을 듯한데. 아, 돌아오고 난 다음에 이 시간에 서고에서 나온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오늘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책더미를 하나 안쪽으로 옮기니 베젠트도 도와주기 시작했다. 입구 쪽에 있던 책들이 적었을 뿐더러 두 사람이 옮겼기 때문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뭘, 내 일이기도 한데.”
베젠트는 비가 오는걸 잠시 보다가 다시 서고로 들어가려는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몇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몸을 돌리더니 나에게 말했다.
“거기 책 좀 하나 건네줄 수 있어?”
“뭔데요?”
“기적의 아침이란 건데.”
책더미에 올렸던 손을 보니 손가락 사이로 기적의 아침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책 위에 있던 손을 살짝 움직여 책을 잡고 들어올렸다.
‘어?’
어느새 다가온 베젠트가 내 손에 들린 책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고마워.”
베젠트가 말끝을 살짝 높이면서 장난 섞인 대답을 했다. 베젠트는 웃으면서 책을 한번 흝어보고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실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