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리넨의 서재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계산대를 보고 스코비아는 서고에서 책을 가져왔다. 얼마 뒤에 스코비아는 처음에는 저지당했던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에게 책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과 책을 구해오는것을 빼면-할아버지는 주기적으로 외출해서 책들을 구해왔다.- 서점 일들을 거의 우리 둘이서 하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들도 나나 스코비아가 만들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것보다 훨씬 맛이 좋다면서 좋아했다. 어느 날은 리슈넬 언니를 잠들기 전까지 완벽하게 잊을 수 있는 날이 있기도 했다. 그런 날을 맞을 때면 자기 전에 마음 한 쪽에서 죄책감이 점점 커져 나를 집어삼켰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리슈넬 언니 생각에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적이 많아졌다. 그런 와중에도 이 생활에 익숙해져가는 내 자신이 밉다.




우리가 서점에서 일하며 생활하기 시작한지도 어느 사이엔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 날도 할아버지는 흔들의자에 누워-앉는다기 보다는 눕는 다는 표현이 역시 정확해보인다.- 천천히 의자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해는 벌써 하늘 중앙에 턱하니 걸려있었다. 날씨가 아주 좋아 서점 밖 거리는 빛으로 가득해 모든 사물이 제대로된 색깔을 뿜어냈다. 평소의 길거리는 먼지가 가득낀 것 같이 보이게하는 그런 색깔들이었다.

오전에 어느 부잣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한명와서 예약된 책을 사간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 할아버지는 계속 졸고 있었고 스코비아는 서점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서점 밖을 보고있다.

사람들이 푸근한 날씨 속에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의 한 여자의 얼굴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선가 본 사람같았다. 이 마을에 살고있는 여자 중에 이 거리를 많이 지나다니는 여자라 생각했다. 여자는 움직이기 편한 갈색 상의와 바지를 입고있었는데 밝은 빛 때문에 땅의 일부같이 보였다. 그녀는 우리 서점으로 곧장 다가오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우리 가출소녀. 일은 잘하고 있었어?”

베젠트였다.




누워만있던 할아버지가 일어나 베젠트 언니를 맞이하고 나와 스코비아는 인사를 했다. 베젠트는 그 전에 봤을 때보다 활기가 넘쳐보였다. 베젠트가 몸에 가지고있는 것은 약간의 돈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어디에서 밥을 얻어먹기에는 글러먹은 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디서 고생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전혀 풍기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그래. 뭔 짓거리를 하면서 돌아다녔냐.”

할아버지가 베젠트를 보는 모습이 장성한 딸을 흐믓한 마음으로 보는 아버지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 그러고보니 할아버지와 베젠트가 어떤 관계인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 난 지금까지 베젠트와 할아버지를 서로 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두 사람은 가족이란것이 확실한 것 같았다.

“마음을 바로 잡고 왔죠. 그 때와는 다르게 이젠 활기가 넘쳐 흐른달까요.”

베젠트는 가까이 있던 책을 한 권들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좌르르 넘겨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결심을 굳혔죠.”

베젠트는 단호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하는 [그 때]가 언제를 의미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처음만났던 그날 밤 그 때일까하고 어림짐작해봤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생각인걸 확인하고 고개를 저어 날려버렸다.

“그러냐.”

할아버지는 걸음을 옮겨 계산대 옆의 흔들의자로 다가가 의자에 누울려다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대 위를 손으로 한번 쓸어 본 다음에 의자에 누웠다.

“그럼 네가 다시 계산대를 지키는 일은 없겠구나.”

베젠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서 시장 좀 봐와라. 베젠트가 왔으니 마음 껏 사와봐.“

할아버지가 스코비아에게 은색 동전을 주면서 말했다. 나는 그것이 전에 아수씨가 줬던 동전임을 기억해냈다. 아수씨는 그 뒤로도 몇 번 서점에 왔지만 은색 동전은 쓰지는 않았었다. 어느 날 금고에서 은색동전이 없어졌길래 할아버지가 책 구하는데 썼을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우리들이 막 나서려는 참이었다.

“너희들 어디가니?”

베젠트가 입고있던 갈색옷을 단출한 상의와 치마로 갈아입고 나오고있었다. 오늘 처음봤을 때 베젠트가 너무 밝은 빛 속에 있어서 그랬을까? 갈색 옷을 입고있던 베젠트와 지금의 베젠트는 너무 차이가 났다. 너무 초라했다. 이게 베젠트의 진짜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아까전에 본 것과 너무 대조되서 이렇게 보이는 걸거다.

“시장 좀 보려 나갈려고요.”
“그래? 나도 같이 가자.”

본인을 축하해주기 위해 시장을 보려가는 것인데 당사자가 같이 가겠다고하니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봤다. 할아버지는 그냥 흔들의자에 누워 그 삐그덕 거리는 의자를 흔들고 있었다. 그 사이 베젠트와 스코비아가 어느새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전 내가 보았던 밝은 빛은 그 위력이 한층 약해지고 붉으스름한 빛이 두 사람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시장 쪽에는 우리말고도 찬거리를 사려는 아녀자들로 가득차있었다.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뭘 사는지 보는것이 어릴 때 리슈넬 언니와 같이 다니던 때를 생각나게 한다. 씁쓸하다.

“어머, 할아버지가 왠 일로 이런 큰 돈을 쓰라고했지?”

베젠트가 스코비아에게서 넘겨받았는지 은색동전을 들고 감탄했다. 그 반응을 봐서 베젠트도 할아버지가 그런 큰 돈을 쓴적을 본 것은 몇 번 없는 것 같았다. 가족이 집을 오랫동안 나갔다가 돌아와서 큰 맘먹고 쓰라고 허락해준 것일까?
우 리는 베젠트의 기호에 따라 음식들을 사려고했지만 베젠트가 우리를 신경써준 덕분에 스코비아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사게됐다. 마지막으로 국을 끓일 돼지고기를 사고 돌아가는 길에는 거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야흐로 완벽한 오후였다.
붉은 거리는 낮에 보았던 밝은 거리와 다르게 뭔가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고있었다. 같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인데 왜 이렇게 서로 다른걸까. 낮에 보았던 빛은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는 빛이고 지금 빛은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드는 빛인가? 그럼 진짜는 언제 볼 수 있는거지? 진짜는 빛이 없어야 볼 수 있는건가? 아니 빛이 없으면 일단 볼 수가 없잖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아도 뭔가 중요한게 하나 빠진것같은것 같아 나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스코비아는 남은 동전을 셈하고 베젠트는 야채나 고기들을 담은 헝겊 주머니 안을 보면서 싱긋 웃는게 저녁에 만들어질 음식을 미리 예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좀 더 오후의 붉은 빛에 도취되며 걸었다.

“어? 베젠트!”

쾌할한 남자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날아왔다. 곧바로 목소리가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수씨였다. 아수씨는 곧장 우리에게 달려왔다.

“안녕, 얘들아?”

아수씨와 스코비아가 서로 알게된건 얼마되지 않았지만-스코비아가 청소를 시작하고도 한참 뒤에야 아수씨가 왔었다.- 그런대로 얼굴은 익혔었다. 어쨌든 아수씨의 관심은 우리가 아니라 베젠트 였다.

“언제 돌아왔어?”
“오늘 왔어.”

베젠트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생겼지만 말에는 오랜만에 만나 감격에 겹다거나 하는 그런 감상적인 느낌은 전혀없었다. 어제 오늘 만난 친구를 길에서 또 한번 만나서 건네는 인사말 같았다. 하지만 아수씨는 그게 아니었다. 아수씨는 베젠트를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귀까지 빨개있었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하는 모습이 흡사 어린애 같았다.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었어.”

그 말에 아수씨가 날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려봤다. 그 때 아수씨가 놀랐었나? 아니, 혹은 그 전에 베젠트가 없어진 걸 알지않았을까? 아니다. 생각해보니 아수씨는 날 처음 봤을 때 베젠트가 어디갔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 동안 뭘했어?”
“결심을 굳혔어.”
“그래?”

아수씨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피더니 베젠트의 귀를 손으로 가리고 짧게 귓속말을 했다. 베젠트는 킥하고 웃었다.

“그래.”

아수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않은채 다시 다물었다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그 어떤 말도 입밖으로 내지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러자 베젠트가 싱긋웃었다.

“각오도 했어. 이젠 돌아갈 길도 없고.”

둘이 하는 말이 대체 뭘 말하는 걸까하고 대화에서 유추해내려 했지만 내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뭐 별로 속상하지는 않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자.”

아수씨가 이 말을 하고 베젠트와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음 저 쪽 사람들 속으로 섞여 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스코비아가 베젠트에게 무슨 각오를 했냐고 물으니 “대단한 각오.”라고 말해주었다. 베젠트 나름대로 멋진 말을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이해가 되지않으니까 그저 황당할 뿐이다.
그 날 저녁에는 정말 오랜만에 배터지도록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먹고나서 씻지도 않고 바로 자버렸다. 아마도 뒤처리를 스코비아가 했을것 같았는데 그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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