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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mile
  •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유시민.김세라
  • 16,200원 (10%900)
  • 2026-03-25
  • : 74,180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두어 달 전에 유튜브 <매불쇼>를 보다가 초대 손님으로 나온 유시민 작가님의 신간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는 책을 알게 되고, 인터넷 서점으로 가서 주문해서 읽었단다. 누군가는 유시민 작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빠에게 유시민 작가는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스승님과 같은 분이란다. 그래서 그의 신간이 나오게 되면 꼭 읽곤 한단다. 이번에 나온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는 책의 부제는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로 되어 있단다. 강순희라는 분을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강순희라는 분은 어떤 분일까? <매불쇼>에서 유시민 작가가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대충 해주셔서 강순희 님이 인혁당 사건의 유가족이라는 것을 알았단다.

인혁당 사건은 인민혁명당 사건의 줄인 말로, 1964년 첫 번째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두 번째 인혁당 사건이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두 번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인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고문을 가해서 자백을 받는 식으로 누명을 씌우고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하여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내린 지 하루도 안되어 사형을 집행하는 만행을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렀단다. 전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사법살인의 사례로 알려졌단다. 암울한 독재 시대의 잊지 못할 잔상이구나. 그들뿐만 아니라 연좌제로 그들의 가족도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는데,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의 강순희 님은 인혁당 사건의 사법살인의 희생자 우홍선 님의 아내 되시는 분이란다.

1998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되었고, 2005년에 다시 재판이 시작되어 2007년에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해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단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다행이라고 하기도 뭣 하구나.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이라도 달래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홍선 님의 아내 강순희 님은 직접 유시민 님께 연락을 하셔서 자신의 자서전 작업을 부탁하셨다고 하더구나. 이 책은 강순희 님이 2011년 4.9통일평화재단과 진행한 인터뷰한 내용과 최근에 유시민 님과 진행한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책이란다.


1.

강순희 님은 1933년 함경북도 박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 아버지가 하얼빈에서 와이셔츠 사업을 하셔서 어렸을 때는 하얼빈에서 자랐대. 세 살 때 하얼빈으로 이사를 가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지냈다고 했어. 그리고 광복 2년 전에 다시 박천으로 돌아와서 해방을 맞았다고 하는구나. 북한에서는 해방 후 대대적으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강순희 님의 아버지의 땅도 나라에 몰수 당했다고 했어. 그리고 사업을 위해 아버지는 남한에도 오가곤 했다는구나.

강순희 님은 평양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어. 고등학교 3학년 때 전쟁이 일어나서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는구나. 대전에서 옷가게를 하다가 아버지의 의견으로 다시 부산까지 내려왔대. 강순희 님은 부산에서 남강고아원이라는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일을 했어. 그러다가 지인 소개로 한국은행에 취직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다는구나. 그렇게 한국은행에 취직했지만, 강순희 님의 꿈은 학교 선생님이기 때문에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대학교를 다녔대. 그러다가 결혼을 하면서 그 꿈을 잠시 중단했다는구나. 당시에 우리나라 사회에서 여성이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대학교를 다니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결혼까지 했으니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구나.

강순희 님이 우홍선 님을 만나 결혼한 사랑이야기도 해주셨어. 강순희 님의 친구의 남편이 전쟁 중에 죽어서 그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우홍선 중위가 찾아왔는데 강순희 님도 한자리에 있어서 같이 만나게 되었고, 둘은 첫눈에 반해서 사귀는 사이로 발전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그때가 1956년이었는데, 당시 한국사회에서 결혼 후에 여자가 회사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 하지만 양가 부모님 모두 개방적이시고 좋은 분이시라 결혼 후에도 한국은행을 계속 다니셨대. 아이들도 낳고 하면서 결혼한 후에도 10년을 더 다니시다가 퇴직금이 사라진다는 해서 그 전에 그만 두셨다고 하더구나. 딸 셋 아들 하나를 낳고 애처가 남편과 함께 평범하면서도 행복한 생활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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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강순희) 그 사람이 맨날 그랬어요. 사람은 살면서 선택을 잘해야 하는데 배우자를 잘 고르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나를 잘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내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어요. 무시했으면 내가 가만있지도 않았겠지만, 남편 떠난 다음에 지인이 해준 이야기인데, 한번은 얘기를 하다 말고 일어서더래요. 무슨 약속 있냐고 하니까 아내를 만나기로 했다면서 휙 가버렸대요. 그때는 어이없었다 하더라고. 그 사람하고 이웃에 산 적이 있어요. 갈현동 살 때였는데 바로 길 건너편으로 이사온 거예요. 그 집에 놀러 갔을 때 남편이 과일을 포크로 찍어서 나한테 줬어요. 그걸 보고 다른 집 여자들이 남편한테 자가지 긁었나 봐. 남편들이 안 되겠다고, 우리더러 빨리 이사 가라고 우스개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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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4년 통일운동 모임이 있어 참석을 했을 뿐인데, 이 모임을 인혁당 사건으로 조작하여 수배령이 내려졌단다. 1년 동안 도피하다가 잡혀서 구치소에 들어갔고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고 하는구나. 억울했지만 그래서 집행유예라서 다행이었구나. 출소한 후에도 사업을 하며 평범한 생활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 사건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질 즈음인 1974년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났어.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사건이었어. 그래서 무죄로 판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무죄를 호소하는 편지를 정부 관련자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편지를 쓰셨다고 하는구나. 박정희와 육영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했어.

하지만 1974년 7월 11일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곧이어 9월 7일 2심에서도 사형 선고를 받았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어. 그때부터 다른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가족들과 함께 본격적인 구명 운동을 했다고 하는구나. 조지 오글 목사,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국내외 종교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었어. 수많은 사람들의 탄원서도 받아냈단다. 이 때 명동성당에서 강순희 님이 호소문을 낭독했는데 그 글도 명문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글을 보고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없겠다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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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36)

(유시민) 그 호소문을 보면 좋겠다 싶어서 찾아봤어요.

“우리들은 살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저희들은 10년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작된 인혁당에 묶여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아내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혁당을 조작하여 북괴에 이롭게 하는 것은 ‘무슨 법, 무슨 조’에 해당하는지 만천하에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디 저희들의 남편을 정치 제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이름 없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정치 제물로 삼는다면 그 제물 위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이 피더라도 향기 없는 꽃이요, 빛깔 없는 꽃이요, 생명력이 없는 꽃일 것입니다. 죽이고 난 다음에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 이 절실한 호소를 모른 체 묵인함으로 저희들의 남편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자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정에서는 저희 남편들을 사형을 시켜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저희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저 무시무시한, 온 권력을 다 가진 정보원들과 아무 힘없는 저희들과 누구의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물론 둘 다 믿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자세일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 못 믿겠으니 가만히 있자!’하는 것은 공정한 입장에 선 것이 아니라 정보원들과 같은 편에 서서 저희들이 남편을 죽이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저희들이 원하는 공명정대한 재판을 죽이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저희들이 원하는 공명정대한 재판을 하라고 하신다면 이는 저희들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다 못 믿겠으니 온 국민이 납득이 가는 공정한 재판을 하자 하는 가장 공정한 입장이며 국민의 권리며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시지 마십시오. 만약 포기하신다면 8인의 생명을 죽이는 데 도움을 준 결과가 될 것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살인자들의 편에 서게 되는 결과가 되리라 믿습니다. 저희들의 남편은 주교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시인도 아니요, 교수도 아니요, 목사도 아닙니다. 따라서 인혁당원도 결코 아닙니다. 이름 없고, 힘없고, 짓눌린, 선량한 대한민국의 한 국민입니다. 더 이상 저희는 ‘사형’이라는 몸서리쳐지는 말을 들을 기력이 없습니다. 피를 토하는 아픔과 절망을 의식하며 여러분 앞에 호소 드리는 바입니다. 1974년 12월 5일. 가족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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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청원하고 호소했지만,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사형을 선고했단다. 좌절감을 느낀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날 면회를 위해 감옥을 찾아갔지만 이미 사형 집행을 하고 난 후였단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불과 50년 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란다. 이 사법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는 그럼 누구인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단다. 아빠도 이 사건에 대해서만 알지 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악한들은 누군인지 몰랐단다. 아빠의 기억력이 나쁘지만 조금이라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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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민복기(1913~2007)는 이완용의 사돈이자 자신도 일제 귀족 작위를 받았던 민병석의 아들로 경성에서 태어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다음 경성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미군정청 법률심의국장을 거쳐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대통령 비서관, 법무부 차관,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968년부터 10년 넘게 대법원장 자리를 지켰다. 두 번째 임기에 인혁당재건위 사건 상고를 기각해 사형에서 징역 15년까지 모든 피고인의 형을 확정했던 그는 1978년 정년퇴임하면서 “내 재임 시의 공과는 후세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전두환의 국정자문회의 위원 위촉을 받아들였고 국정자문회의 위원직도 수행했던 민복기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부친과 나란히 올랐던 민복기의 이름은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박정희가 자행한 ‘사법살인’의 하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당시 대법관은 민복기,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 김윤행, 임항준, 한환진, 안병수, 이일규 등 13명이었으며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은 이일규 한 사람뿐이었다는 사실을 덧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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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을 허망하게 잃었지만, 강순희 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단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살아가야 했단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그리움 또한 잊지 않았어.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한 편지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모곡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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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저 구름 넘어 아득한 곳에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남은 여생을

가시밭길을 걸어서 걸어서

단 한번 만이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나 어떤 가시밭길이라도 멀다 하지 않고

외롭다 하지 않고 고달프다 하지 않고

힘껏 달리고 달려가련만

오! 이처럼 간절한 바램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니

나, 시작도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이 서러움을 감당할 길이 없고나,

감당할 길이 없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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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희 님의 억울함을 속으로 삭이지만 않고, 밖으로도 쏟아 부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병이 나지 않으셨을까 싶구나. 억울하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자에게 독재자도 무섭지 않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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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강순희) 택시 기사들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웃 사람들도 다 좋았어요. 그때 우리집 골목은 양쪽으로 집이 쭉 있었으니까, 한 집에서 큰 소리가 나면 다 들렸는데도 내가 맨날 문 열어놓고 소리 질렀어. ‘박정희 살인마!’ ‘민복기 살인마!’ 하도 분해서 ‘나도 잡아가라, 모르는 사람이 우리집 쪽을 쳐다보면 이웃집 아줌마들이 그냥 지나가라고 했지. 다들 우리 부부를 안타깝게 봤던 것 같아. 그 골목에서 우리 아들 친구네가 살았는데 그 엄마가 하는 말이, 우리 부부가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일부러 내다보곤 했었대. 가뭄이 심해서 동네에 물차가 온 적이 있어요. 물통을 갖다 놓고 물을 받는데 제대로 안 되는 거야. 열불이 나서 한마디 했지. ‘야, 이 개새끼야! 나, 박정희 새끼 잡아 먹고 싶은데 오늘 어느 놈이든지 박정희 대신 잡아먹어야 되겠다!’ 물차 운전사가 막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날 건드리지 말라고 말리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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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강순희 님의 인터뷰의 내용을 읽다 보면 아빠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주는 글들이 참 많았단다. 구순을 넘긴 어르신의 인생에 대한 정의도 요즘 심리적으로 조금 힘들었던 아빠에게 위안을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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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강순희)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공책에 ‘인생이란?’하고 써놓은 적이 있어요. 담임 선생님이 그거 보고 놀렸어. ‘야, 순희, 벌써 인생을 생각하냐?’ 인생이 뭘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서 극복하며 사는 거,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애들한테 늘 그렇게 얘기했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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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힘껏 노력하는 사는 것, 쉽지 않은 삶의 철학인데 그것을 실천하면서 사셔서 남편을 억울하게 잃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 같구나. 그리고 그런 삶의 자세로 한 평생을 살으셔서 인터뷰를 하신 유시민 님도 “나도 아흔세 살까지 산다면 ‘아흔세 살의 강순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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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강순희) 사는 동안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해요. 불행하지 않았어요. 행복하게 만났고, 행복하게 살았고, 행복하게 애들 키웠고, 일도 닥치는 대로 행복하게 했고, 남편 때문에 싸울 때도 있는 힘을 다했어요. 행복이란 게 사람마다 달라요. 남들 눈에는 행복해 보여도 그 사람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행복했다’ ‘불행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은 거예요. 주어진 운명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았다는 걸로 나는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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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는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읽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한 분의 좋은 스승님을 만난 기분이란다. 아빠가 오늘 독서편지를 쓰면서 책의 내용을 많이 인용했는데, 그 외에 좋은 글들도 많아서 더 많이 따로 발췌를 했단다. 50년 전 같은 사법살인이 설마 우리나라에서 다시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2024년에 그 근처까지 갈 뻔한 사건이 있었기에 방심할 수는 없단다. 인간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당시 사법시스템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사법 카르텔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2년여 동안 목격을 했단다. 이런 시스템을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개혁이 되었으면 좋겠으나 사법부가 잡고 있는 권력이 너무 막강하여 지지부진한 것 같더구나. 국민들의 공감대의 힘이 약해지기 전에 얼른 사법 개혁이 진행되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2025년 5월 21일 오후,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책의 끝 문장: 나도 아흔세 살까지 산다면 ‘아흔세 살의 강순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강순희) 노무현 대통령 생각하면 유시민 작가 생각나고, 유시민 작가 생각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나요. 내가 구순 잔치에 노무현 대통령 초대하고 싶었어요. 돌아가셔서 못 하게 되었으니까, 문재인 대통령하고 유시민 작가 초대하려고 했어. 그랬는데 윤석열이 대통령 되는 바람에 구순 잔치를 안 했어요.- P16
(199)
(강순희) 다시 볼 수 없다는 거, 딱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데 어디 가도 볼 수가 없다는 거, 그게 참 기가 막히더라고. <전쟁과 평화> 영화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죽자, 여자가 제일 먼저 한 말이, ‘당신 어디 있느냐’는 거였어요. 나는 그 사람 만나려고 산소에 갔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꼭 갔지. 택시 타고 다녔어. 누구 보기가 부끄럽더라고. 그래서 버스를 못 타는 거야. 밖에 나가지도 못하겠고, 누구를 만나지도 못하겠더라고요. 꼭 내가 잘못해서 남편이 죽은 것 같았어. 누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나 혼자 그랬던 건데, 이거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다들 그랬대요.
- P199
(강순희) 택시 기사들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이웃 사람들도 다 좋았어요. 그때 우리집 골목은 양쪽으로 집이 쭉 있었으니까, 한 집에서 큰 소리가 나면 다 들렸는데도 내가 맨날 문 열어놓고 소리 질렀어. ‘박정희 살인마!’ ‘민복기 살인마!’ 하도 분해서 ‘나도 잡아가라, 모르는 사람이 우리집 쪽을 쳐다보면 이웃집 아줌마들이 그냥 지나가라고 했지. 다들 우리 부부를 안타깝게 봤던 것 같아. 그 골목에서 우리 아들 친구네가 살았는데 그 엄마가 하는 말이, 우리 부부가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일부러 내다보곤 했었대. 가뭄이 심해서 동네에 물차가 온 적이 있어요. 물통을 갖다 놓고 물을 받는데 제대로 안 되는 거야. 열불이 나서 한마디 했지. ‘야, 이 개새끼야! 나, 박정희 새끼 잡아 먹고 싶은데 오늘 어느 놈이든지 박정희 대신 잡아먹어야 되겠다!’ 물차 운전사가 막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날 건드리지 말라고 말리고 그랬어요.- P201
(강순희) 도대체 어떤 놈이 내 남편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느냐, 네깟 것들이 무슨 명예회복을 해주느냐, 이게 나라냐, 나도 힘 있으면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엎고 싶다, 힘이 없어서 못 하는 거다, 이 세상 뒤집어엎으려고 한 게 내 남편의 명예인데, 이 명예가 어때서? 명예 회복 같은 거 신청 안 한다, 돈 몇 푼 보상받는 거 안 한다. 내 생각은 그런 거였어. 명예회복 신청해서 보상받으면 더 분하고 더 억울할 것 같았어. 사람이 죽고 없는데 뭐가 필요하단 말이야? 이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 같지가 않은 거야. 그래서 신청을 안 했어요. 재심 무죄 판결 나고 나서 한명숙 총리가 우리를 공관에 초대했어요. 2007년 2월쯤이었지, 아마? 한 총리가 왜 여태 명예회복이 안 되었냐고 걱정하기에, 내가 안 한 거라고 이유를 싹 설명하고 재판으로 해결했으니까 이제는 할 거라고 했어요. 그 후에 신청해서 했고.- P232
(262)
(강순희) 아무 여한이 없어요. 오늘 밤에 죽는다 해도 괜찮아. 남편 일로 좀 힘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했으니까. 신랑도 잘 만났고, 사랑도 잘 했고, 남편 일로 싸울 때도 잘 싸웠어요.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잖아요. 나한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내 힘껏 노력하고 살았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 죽었을 때는 막 같이 죽고 싶었지.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 그렇지만 아이들 위해 살아야겠다 싶어서 고비를 넘겼어요.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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