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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 감정들에 이미 정해진 간단한 이름들이 있다는 것을 진작 배웠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나는 ‘나만의 이름 짓기’를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걸 몰라서, 모든 것에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어하는 지금의 내가 된 걸까.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말을 이리저리 조합해, 원래 있던 것과 새로 나타난 모든 것에 이름을 짓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51)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80-81)

온 가족 구성원이 화가 많고 예민한 우리집에선 언제나 고성방가가 끊이질 않았다. 동시에 예술적 기질도 많아서 엄마 아빠는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동생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하고, 언니는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리고는 또 박 터지게 싸우다 한 번씩, 한 명씩 부엌에서 칼을 쥐고 나와 휘둘렀다. 어떻게 보면 스펙터클, 어떻게 보면 지옥 같은 광경이 자주 펼쳐졌다. 장례식상에서마저 댄스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욕하고 소리지르며 싸운 것까지도 전부 괴롭고 웃긴 우리 가족의 풍경이었다. 귀신이 된 언니가 그 모습을 봤다면 다들 미쳤다며 껄껄 웃을 것 같았다.

 

(110)

언니는 가족이 싫다고 10대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부럽고 미웠을까.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없던 언니에게 나는 수차례 ‘그만두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언니가 필요로 했던 가족은 아마 건강한 가족이었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뭐라고 부를까. 소진사(消盡死)? 가끔 그렇게 가진 힘을 다 소진하고 죽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평생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

 

(112)

세상에는 완전한 이해도 완전한 사랑도 없다. 모두들 살아 있기 위해서 견디는 것만 같다. 하지만 저마다 느끼는 감정은 너무 다양하고 그중엔 고통을 기반으로 하는 감정들이 더 많다. 분노로 질투로 좌절감으로 절망감으로 삶에서 멀어지고픈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내 등뒤에 나에게 의지하는 생명이 있다. 모든 소중함에도 한계가 있다. 등뒤에 준이치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 내가 여러 가지 죽음의 방법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도 준이치를 두고 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못 할 것 같다. 살아서, 다음주에 준이치를 병원에 데려가야한다.

 

(149)

깊은 사랑과 냉철한 이성과 오래된 우울감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언니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을 모른다고 서로 말하던 우리 두 자매였는데, 언니가 떠난 뒤에 나는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생겼음을. 그래서 무척 아프고 괴롭지만 굉장한 것을 배우고 있음을 언니에게 꼭 말하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어쩐지 언니에게 전해질 거라고 느낀다.

 

(157-158)

30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젊은 여성 역할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20대 여성만을 주로 소비하는 가부장제 속에서 30대 여성으로서 느끼는 자유도 조금씩 생기고 있던 참이었다. 하기 싫은 것부터 하나씩 줄여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사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 여성 역할 수행을 너무 오래 했던 탓일까. 이제 와서 내가 원하는 모양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정신을 사용한 창작과 그 창작을 포장하기 위한 용도로만 몸을 사용했다. 몸을 위한, 몸이 원하는 삶의 방식은 지금껏 생각해보질 못했다.

 

(189)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땅에 발을 붙이고, 정신과 몸을 붙여내고야 만다. 반면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머리만으로 산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몸을 놓고 살았다. 감정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방법이 대체 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겪는 공황은 머리의 파업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끼니 몸 전체를 셧다운시켜서 몸도 머리도 멈추게 해버리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4-205)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정신과 몸은 사실 하나였다. 영혼, 정신, 마음이라고 불리는 그것들 모두가 결국 ‘몸’ 자체였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찰나의 순간으로 결정되는 부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온몸으로 영혼의 실재를 기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닿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부재와 나의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들의 몸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내 몸을 가지고 그들의 기억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살아 있고, 기억하는 동안 내 세계에 그들은 함께 있다. (다만 영혼이나 유령으로서가 아니가 기억으로서.)

 

(205-206)

나는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인간을 좋아한다. 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하는 인간이 좋다. 살아나가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좋다. 살아갈 방법을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인간이 좋다. 자신의 방법을 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좋다. 더 탁월한 방법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좋다. 겪기 않은 이야기로 끝없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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