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152-153)
꼭 연애 상대가 아니더라도 희주는 ‘일단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뒤
찝찝한 후회나 반추를 안 하게 만드는 사람. 상대에게 자신이 판별당하거나 수집당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사람. 근본은 따뜻하되 태도는 직장에서 진심이니 우정이니 하는 걸 바라는 것 또한 천진한 태도임을 알았지만, 살면서 ‘일단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은 뜻밖에 드물고, 있더라도 그 수가 점점 줄기 마련임을 깨달은 기태는
희주와의 인연을 귀하게 여겼다. 아니 사실 그거면 족하다 싶었다. “살맛난다
할 때 그 살맛이 이 살맛이구나” 장난치며 서로의 목이나 손등을 남발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땐 육체의 쇠락을 과장하며 서로를 늙은 배우자인 양 놀리고,
그러면 마치 노년의 남루와 공포가 줄기라도 할 것처럼 농담과 연민을 미리 당겨쓰고, 세상
무심하고 친밀하게 등과 두피에 난 여드름을 짜주고, 상처와 비밀을 나누고, 말을 아끼고, 오래 안고, 우리가
식물과 달리 똥도 싸고, 아름답지도 않고, 울기도 하는 존재임을
가여워하고 수긍해주는 정도라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163)
지수는 ‘죽어도 좋은 칼에 죽고 싶었는데, 것도 환상이고 허영임을 알았다’고 토로했다. ‘권력 투쟁의 장에서 좋은 죽음이 어디 있느냐’며, “그냥 죽음만 있는 거지”하고 비장한 얼굴로 와인을 들이켰다.
(175-176)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실제로 기태의 젊은 시절 꿈은 훌륭한 어른은 못 돼도 산뜻한 중년은 되는 거였다. 청결한 옷을 입고, 타인과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젊은 세대를 지지하고,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는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 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231)
나는 뭐라 더 말을 못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마나 한 말’을 최대한 진심어리게 하는 것도 어른의 화법일 텐데, 누군가의
부고와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가 가진 표현의 한계와 상투성에 어쩔 줄 몰라했다. 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닌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