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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가족과 일 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뭘까 생각하니 예나 지금이나 소설 읽는 즐거움만 한 것이 없었다. 읽은 소설을 통틀어 내 즐거움이 비교 기준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오스틴의 여자 주인공들에게서 내가 되고 싶은 여성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작품들에 대한 향수가 가슴에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재활 치료라 생각하고 다시 독서에 열중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선은 오스틴의 소설 여섯 편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를 오스틴의 애독자로 만들어준 그 촌철살인의 위트와 귀가 닳도록 인용되는 문구들과 생기 넘치는 대화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독서법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오스틴의 작품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 세계관의 프레임에 비추어 내 인생의 만족과 불만족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51)

제인 오스틴이 보여준 언어의 가능성을 활자로, 또 내 귀로 발견했을 때 내 앞에 소설로 통하는 새로운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문이 닫혔다. 어머니와 내가 일주일에 한 번 울타리 너머에서 우리 앞마당에 던져놓고 가는 잡지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어머니는 유명 인사의 가십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나는 틈새에 실린 단편소설을 읽어치우던 그런 시절이 안녕을 고했다. 클리셰니 스테레오타입이니 하는 말은 모를 때였지만, 햄릿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작법과 인물들이 어딘지 “식상하고 밋밋하고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흥미가 사라져버렸다.


(84-85)

오스틴은 엇나가기 좋아하는 습성으로 진득한 책 읽기를 거부하는 인물을 <에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독어야말로 무지와 무분별함과 도덕의식의 결여 같은 인간 본성의 과오는 바로잡을 해독제라고 이야기한다. 주인공 에마는 독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읽겠다고 마음먹은 책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 이상으로 열정을 발전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에마가 나이 차가 나지만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이면서 서사가 충분히 무르익으면 결국 그녀의 연인이 될 운명인 나이틀리 씨는 에마의 예전 가정 교사에게 마음먹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다소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에마의 공상의 나래를 독서가 바로잡아줄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과연 에마는 자신에게 유독 타인과 타인의 의도를 이해하는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때 깨달음의 매개는 경험이다. 어떤 인생이든 태반은 의심, 불확실, 실망이 뒤죽박죽되기 마련일 텐데, 큰 틀에서 볼 때 내 경우에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것들을 다스리는 치유법을 찾아갔던 것 같다.


(157)

사춘기에 접어든 그때 나는 현실에서처럼 빛과 그림자가 불가분하게 뒤섞인 세상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체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이 창조한 세상이 아닌 한 작가가 창조한 허구의 세계였다. 그가 소리와 인격과 생각을 불어넣어 완성한 정연한 패턴 안에 단순한 결혼 플롯을 뛰어넘는 인생의 비전이 담겨 있었다. 내가 평생 이어갈, 궁극적으로 내 삶의 암흑기에 빛을 비춰줄 허구의 경험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67-168)

나는 세월이 쌓이고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게 느껴질수록 소설 안에서 역사가 다뤄지는 방식에 관해서 관심이 증폭되다 못해 이제는 역사적 호기심의 노예라고 해도 될 판이다. 소설이 어떻게 과거로 현재를 재구성하는지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고 소설 안에서 인생살이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발견하는 유익한 효과도 따라온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캐서린은 역사책이 온통 “짜증 나고 지루한” 이야기뿐이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틸니 양은 친구의 의견을 받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역사를 집필하는 사람들 쪽으로 슬쩍 주제를 선회한다. “역사가들은 기꺼이 공상의 나래를 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군요. 흥미를 자아내지 않더라도 그들도 상상력을 발휘하긴 하죠.”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리저리 튀며 두 아가씨의 정신세계를 비춰 보인다.


(225)

그리하여 나는 팔십 줄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모든 여학생들이 졸업 앨범 방명록을 간직하던 시절, 브레인 선생님으로 짐작되는 이가 내 졸업 앨범 방명록에 대략 이런 의미의 글귀를 남겼다. 공중에 누각을 지은들 이떠랴, 토대만 단단히 세우면 그만이지. 글귀 아래에는 철학자 소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미 나만의 누각에서 살고 있었고, 어쩐지 앞으로 10년 안에 그럭저럭 토대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어떤 예감이 찾아오고 있었다. 흔히들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는 그런 황홀한 도취가 다시 한번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이번 상대는 인생이라는 것도.


(310)

나는 <맨스필드 파크>를 내려놓고 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내 감정들은 폭풍우가 지난 뒤 에마가 경험하는 고요함과 온화함과 화사함에 한결 가까워져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패니의 위상이 높아지는 게 아니꼬운 노리스 부인과 패니 사이에 한창 긴장이 심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르스 부인이 발버둥 쳐봤자 장차 맨스필드 파크 안에서는 영지 관리의 공정성이 검토될 것이고 그러면서 개인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부각될 것이고 그럴수록 패니의 역할은 더욱 확실해지리라. 억압적인 남성이 권위에 꺾이지 않는 패니 프라이스는 얼마나 용감한가. 두 번째로 그 사실을 확인하며 나도 재삼 결의를 다졌다. 내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되 결코 내 이익을 팽개치지 않으리라.


(352-353)

물론 에마의 마음을 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내 나이는 에마보다 예순 몇 살이 더 많았지만, 지금도 늦은 건 아니지 싶다. 인간의 변화 의지에 시간 제약이 따로 있겠나. 에마가 자신과 타자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다다랐을 때 그런 마음 상태를 가리켜 비평가 라이어널 트릴링은 지적인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꽤나 의미가 마음에 든다. 사랑을 기억력처럼 지능의 한 형태로 본다니 위안이 좀 되지 않나. 대관절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은 사랑에 관해 학습할 기회를 얼마나 끝없이 제공하려는 건지. 중요한 건 몇 번이고 되풀이하되 매번 세심하게 읽는 것이겠지. 오스틴은 세심한 독서에도 ‘끄떡없다’라고 오스틴의 팬인 손턴 와일더는 말하더라. 제인 오스틴 개인의 삶의 반경이나 소설의 사회적 반경이 제한적이었다고(성 경험이 부족했으리라는 추정과 함께) 이야기할 수는 있는지 몰라도 그의 관찰과 사유가 길러지는 상상력이라는 토양은 더없이 비옥하고 풍요롭다. 나도 그 토양의 기운을 끌어와 내 인생의 중심에 사랑을 길러보련다. 흔한 사랑 말고 다른 사랑들, 공감적 독서에 대한 사랑이나 자신에 대한 사랑 같은 것 말이다.


(375)

어떻게 해야 더 명료하게 내 뜻이 전달되려나. 나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까놓고 말하자면 관습의 틀 안에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기망한 거야. 안전한 삶에 안주한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튕겨 나가고 있더라. 내 자리를 지키기는커녕 밖으로 밀려나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니, 내가 고작 이 정도인가, 인생에서 얻은 게 고작 이 정도인가 싶어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좌절했어.”


(398)

그런 여성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뒤흔든 강고한 의지의 여성들이 있다. 소설을 통해 조심스러우나 신랄하게 세상을 동요시킨 제인 오스틴이 있었고, 저술과 삶 양쪽 모두에서 당대 사회의 존립 기반에 파문을 몰고 왔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외에, 오스틴처럼 재능이 있지도 못하고 울스턴크래프트처럼 대담하지도 못한 우리들이 있다. 단지 우리 인생의 정형화된 패턴을 바꾸고 싶은 소박한 욕구를 가진 우리를 말이다. 솔직히 이미 어지간한 축복을 욕구를 가진 우리들 말이다. 솔직히 이미 어지간한 축복을 누리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차마 부인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개인적이든 문화적이든 이유가 어떤 것이든 우리가 누리는 축복에는 제인 오스틴의 <에마>에서처럼 가정법이 전제되어 있다. 세상만사가 에마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실상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고 오스틴의 언어와 상상이 귀띔해주지 않던가. 에마는 그렇게까지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 못 된다. 핀홀로 보이는 세상 바깥에 놓인 것까지 보는 능력은 못 가졌으니 말이다. 대신에 오스틴은 이 인물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 완벽하지 못한 여주인공의 완벽한 소설은 그렇게 탄생하더라.


(407)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들은 가능성의 영역이고, 현실의 우리는 우리 나름의 선택을 내리고 이럭저럭 그 선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보면 내가 한때 나의 남주인공으로 착각했던 사람, 그러나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나의 친밀한 동반자가 된 사람과 따로 또 같이 사는 지금의 내 인생에는 소중한 우정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과 내가 공유하는 관계도 있고 애정의 방향이 갈라질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나한테 더 중요한 건 ‘정녕 진실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꾸려갈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준 일등 공신이 지금도 내 책상에 앉아 있는 나의 길잡이 제인 오스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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