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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움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82-83)

“시골 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나쁘다고 해야 할 사람들이지. 그리고 지금 자네는 친척들 중에 이렇다 하게 나쁜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부류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세상에 그렇게 틀에 박은 듯한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지. 평소에는 다들 착한 사람들이네. 다들 적어도 평범한 사람들이지.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면 갑자기 악인으로 변하니까 무서운 거네. 그래서 방심할 수 없는 거지.”


(123)

나는 아버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를 떠난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이라는 점에서 미련이 남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 선생님의 대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한 선생님의 과거도 아직 들을 기회가 없었다. 요컨대 선생님은 나에게 어스레했다. 나는 반드시 그곳을 지나 밝은 곳까지 가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선생님과의 관계가 끊기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가 좋은 날을 잡아줘 떠날 날이 정해졌다.


(152)

자네가 현대의 사상 문제에 대해 나에게 자주 의견을 물었던 걸 기억할 거네. 그 문제에 대한 내 태도도 잘 알고 있겠지. 나는 자네의 의견을 경멸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결코 존중할 수가 없었어. 자네의 생각에는 아무런 배경도 없었고, 자네는 자신의 과거를 갖기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이지. 나는 때때로 웃었어. 자네는 이따금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여주었지. 그러다가 결국 내 과거를 두루마리 그림처럼 자네 앞에 펼쳐 보이라고 졸라댔어. 나는 그제야 속으로 자네를 존중했네. 자네가 멋대로 내 마음속에서 살아 있는 뭔가를 붙잡으려는 결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 내 심장을 가르고 따뜻하게 흐르는 피를 마시려고 했기 때문이네. 그때 나는 아직 살아 있었어. 죽는 것이 싫었지. 그래서 훗날을 기약하고 자네의 요구를 물리쳤어. 나는 지금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가르고 그 피를 자네의 요구를 물리쳤어. 나는 지금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가르고 그 피를 자네의 얼굴에 끼얹으려고 하네. 내 심장의 고동이 멈췄을 때 자네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네.


(178-179)

그토록 여자를 업신여겼던 내가 아가씨는 도저히 업신여길 수 없었네. 내 이론은 아가씨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만큼 힘을 쓰지 못했지. 나는 아가씨에게 거의 신앙에 가까운 애정을 갖고 있었네. 내가 종교에만 쓰는 이 말을 젊은 여자에게 쓰는 것을 보고 자네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네. 진정한 사랑은 신앙심과 그다지 다르게 않다는 것을. 나는 아가씨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들었네. 아가씨를 생각하면 고상한 기분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옮겨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 만약 사랑이라는 불가사의한 것에 양쪽 끝이 있고 높은 쪽 끝에는 신성한 느낌이 작동하고 낮은 쪽 끝에는 성욕이 작동하고 있다면 나의 사랑은 분명히 제일 높은 쪽에 매달려 있었을 거야. 나는 물론 인간으로서 육체를 떠날 수 없는 몸이지. 하지만 아가씨를 보는 내 눈은, 아가씨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전혀 육체의 냄새를 띠지 않았어.


(200-201)

K는 나보다 의지가 굳었네. 공부도 나보다 배는 했을 거야. 게다가 타고난 머리도 나보다 훨씬 좋았지. 나중에는 전공이 달랐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같은 반에 있을 때는 K가 늘 나보다 성적이 좋았어. 나는 평소 뭘 해도 K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자각했을 정도라네. 하지만 억지로 K를 내 하숙으로 데려왔을 때는 내가 더 사리 판단을 잘하고 있다고 믿었지. 내가 보기에 그는 자제와 인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이 말은 특히 자네를 위해 덧붙이는 거니 잘 들어주게. 육체든 정신이든 우리의 모든 능력은 외부의 자극으로 발달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자극을 점점 세게 할 필요할 있다는 것은 당연하네. 그렇기 때문에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아주 험악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도 자신은 물론이고 옆 사람도 깨닫지 못할 우려가 생기는 거지. 의사의 설명을 듣자니 사람의 위장만큼 태만한 건 없다고 하네. 죽만 먹다 보면 그보다 더 단단한 것을 소화할 힘이 어느새 없어진다는 거야. 그러니 의사는 뭐든지 먹는 연습을 해두라는 거지. 하지만 그건 단순히 익숙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만약 반대로 위의 힘이 조금씩 약해지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면 금방 말 수 있는 일이야. K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지만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네. 그저 어려움에 익숙해지면 점차 그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혼자 정해놓고 있었던 것 같더군. 어려움을 되풀이하면 되풀이한 만큼의 공덕으로 그 어려움이 신경 쓰이지 않게 되는 시기가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모양이네.


(269-270)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결심한 내 마음은 때때로 외계의 자극에 펄쩍 뛰어올랐지. 하지만 내가 어떤 방면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엄청난 힘이 나와서 내 마음을 꽉 쥐고 전혀 움직일 수 없게 하네. 그리고 그 힘이 나에게 너는 뭔가를 할 자격이 없는 놈이라며 억누르듯이 말하지. 그러면 나는 그 한마디에 곧 위축되고 마네. 얼마쯤 지나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다시 단단히 죄어오지. 나는 이를 악물고 왜 남을 방해하는 거냐고 호통을 친다네. 불가사의한 힘은 차가운 목소리로 웃지. 네가 잘 알 텐데, 하는 거야. 나는 다시 축 늘어지고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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