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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5)

엘렌은 기차가 메이컨을 떠나기를 기다리면서 이번 기차 여행 이후로는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이곳에 돌아오면 아마 족쇄를 차게 될 것이다. 성공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영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늘이 기도를 들어준다면 윌리엄만은 볼 수 있겠지만, 살아남는다면, 엘렌은 어머니를 해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먼저 그녀와 윌리엄이 자유로워져야 했다.

 

(70-71)

노스캐롤라이나주 포시스 카운티의 어느 도표를 보면 이 사업의 과정을 추론할 수 있다. 예속 피해자의 몸값은 출생 이후로 20세까지 점점 높아진다. 한 살짜리 아이의 가격은 100달러였다. 두 살짜리는 125달러였다. 가격은 7세가 될 때까지 25달러씩 증가한 뒤, 그 이후로는 50달러씩 증가했다. 그러나 20세에 900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에는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55세인 예속 피해자의 가격은 100달러였다. 60세는 50달러였다. 그 이후로는 숫자가 기록되지 않았다.

 

(101)

힐리 가족은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불렀을지 몰라도 법은 그들에게 주인과 노예가 아닌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하게 했다. 조지아주에서 개인에 의한 해방은 금지돼 있었다. 초기에는 조지아주 사람들도 자기 의지에 따라 노예를 해방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주의 조지 워싱턴이 (조건을 붙이긴 했어도) 노예를 해방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시대에 힐리에게는 메리 일라이자나 그들의 자녀를 해방할 힘이 없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백인이라는 점, 그들의 모습도 백인 같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소위 “한방울 법칙”이라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 전체가 유색인종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언제나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다. 흑인이라는 혈통과 예속은 건드려서도 취소해서도 안 되는 영구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힐리 가족이, 그리고 이제는 엘렌도 바로 이런 가정에 반기를 들었다.

 

(256)

크래프트 부부의 특별한 탈출이 신문 1면에 실렸을 때는 미국 정제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멕시코와의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기존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토를 더 얻었다. 정착민들이 서쪽으로, 특히 캘리포니아로 몰려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모든 신문에서 요란하게 광고되었다. 이런 광고의 헤드라인은 “골드러시!”라고 소리쳤다.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들은 “새 배가 떠납니다!”라고 외쳤다. 이 모든 흥분의 한가운데에는 불안한 질문이 있었고, 크래프트 부부의 도망은 바로 그 질문을 강조했다. 이 땅에서 노예제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 전체에서는?

 

(282)

지금 그 기적이 엘렌을 통해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활동가로 전직한 목사 새뮤얼 메이 주니어는 이렇게 감탄했다. “엘렌 크래프트는 (중략) 아름답다고 할 만한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녀의 눈과 두 뺨, 코 머리카락에는 아프리카계 혈통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 전체가 남부 태생의 백인 여성으로 보였다. 그런 여성이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되고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에게 팔려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는 피부가 가장 검은 여성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과 비교해 더 나쁘거나 사악한 일일 리 없지만, 유색인에 대한 편견 속에 자라난 공동체에 천 배는 큰 소요를 일으켰다.”

 

(307)

많은 사람이 엘렌을 백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백인인 이 여성이 흑인 남성을 사랑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인종 간 결혼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지되었던 주에서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엘렌은 청중에게 사회적 질서를 고정해 두는 그 모든 범주의 의미에 질문을 던지라고 요구했다. 그 범주가 북부든, 남부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주인이든, 노예든, 남편이든, 아내든 간에 말이다. 엘렌과 윌리엄은 힘을 합쳐 널리 퍼져 있던 인종차별주의적 주장을 뒤집었다. 흑인은 사회악이거나 최선의 경우에도 자선의 대상이며 구원이 필요하다는 주장, 흑인이 백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주장을 말이다.

 

(429)

마치 노예 사냥꾼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등에 “우리를 체포하세요.”라는 플래카드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달래기가 무섭게 거리에서 흡연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썼다(이들의 고향에서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은 흑인이 저질렀을 경우에만 처벌 가능한 위법 행위였다). 괴로워 소리를 지르면 “신성모독적 욕설” 혐의가 따라왔다. 월요일에 케임브리지까지 쫓겨 갔던 트라우마적 사건은 요금을 내지 않고 과속했다는 더 많은 혐의로 이어졌다. 조지아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무기를 숨기고 다닌다는 혐의를 주가로 썼다. 흑인인 그들의 적은, 신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빨까지 무장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최악은 지역 주민들이 이들의 괴로움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신문에서는 놀리듯이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이지 보스턴 시민의 준법 의식은 대단하다!”

 

(482)

그들은 너무도 긴 거리를 달려왔다. 남부에서 북부로 1,600킬로미터, 뉴잉글랜드 전역을 다니며 다시 1,600킬로미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거친 파도를 건너 4,800킬로미터, 그들은 서로를 위해, 서로와 함께 달렸고 이제는 바로 이곳, 이 시간에 서로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곳은 두 사람이 함께, 충분히 강하게, 각자의 정체성을 따로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구를, 또 무엇을 잃었든 그들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가정을 만들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552-553)

아메리카의 천연자원은 다양하게 전시되었다. 브라운의 말에 따르면, 산처럼 쌓인 햄 더미, 소금과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담긴 통, 때깔 고운 흰색 라드가 있었다. 옥수숫가루와 완두콩, 쌀과 담배, 묵직한 목화 자루도 있었다. 그러나 그 농산물을 기르고 수확하고 도살한 사람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눈부신 방직기에서 나오는 알록달록한 사라사 천을 뽑은 이들이 세계 반대편에서 상품이 되어 구매와 판매의 대상이 되는 남자, 여자, 아이들임을 나타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어떤 사람은 “건방진 근육질 니거 대여섯 명”을 전시회에 데려올까 하다가, 도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공식 카탈로그에서 노예노동에 대한 유일한 언급한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목화에 대한 것뿐이었다.

 

(560)

주인과 노예로서 나란히 선 것도 아니고, 남편과 아내로서 팔짱을 끼지도 않은 채, 친구들 사이에 함께 선 지금의 크래프트 부부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들을 규정했던 역할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세계를 거닐었다. 그들이 순회강연에서 반복적으로 끌어다 쓴 역할, 충격과 눈물, 경이감을 끌어내기 위해 뒤섞어 짜맞춘 역할은 이 마지막 시위에 빠져 있었다. 수정궁은 미국에서든, 그 너머에서든 가능한 삶의 모습이자 하나의 가능성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희망으로 나타내는 투명한 국제적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윌리엄과 엘렌, 엘렌과 윌리엄은 모든 방해에서 해방되어 세계 시민으로서 걸었다. 그들은 더 이상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가 아니었다.

 

(572-573)

“나는 노예 상태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자유보다 노예제도를 선호할 만큼 자유를 부정하는 건 신계서도 금하시는 일입니다. 사실 나는 노예제도로부터 탈출한 이래로 모든 면에서 내가 예상조차 못했을 만큼 나아졌습니다. 만약, 그 반대였다고 해도 이 문제에 관한 내 감정만큼은 똑같았을 것입니다. 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의 노예가 되기보다 잉글랜드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597)

크래프트 부부의 가장 확실한 유산은 그들의 자녀와-부부는 바로 이 아이들을 상상하며 모든 것을 걸었었다-그들이 이루어낸 시적 정의 안에서 계속 살아남았다. 아이들이 나름의 이동성을 발휘하며, 엘렌과 윌리엄이 꾼 꿈을 다양한 형태로 실현했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철도와 우편 분야에 종사하게 되었다. 부부가 낳은 ‘첫 자유인 아이’인 찰스 에슬린 필립스 크래프트는 철도 회사의 우편 담당 직원이 되었고, 브로검은 미국 우체국에서 일했다. 셋째 아들 윌리엄은 영국에 정착했다. 딸인 엘렌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전국 연합의 창립 부회장이 되었고(이 단체는 전국 유색인 여성 연합에 통합된다), 아이다 B. 웰스 같은 활동가와 협력했다. 또한 그녀는 미국의 라이베리아 공사인 윌리엄 데모스테네스 크럼의 아내로서 미국인 ‘퍼스트레이디’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찰스턴의 세관 징수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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