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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단군왕검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건국합니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조선시대 역사서인 <동국통감>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으로 잡고 있는데요. 앞서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조선이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고 했으니 이러면 시기가 맞지 않지요. 이유를 볼게요. 예전에는 한반도에서 기원전 1000년경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그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어요. 현재는 기원전 2000년까지 올라갔는데,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어쩌면 이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어요. 현재는 기원전 2000년까지 올라갔는데,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어떠면 이 시기가 더욱 앞당겨질지도 모릅니다. 기록과 고고학적 성과가 맞닿게 되는 시점도 곧 올 거라 생각됩니다.

 

(65-66)

백제는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존재감이 상당히 미약합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백제에 대한 기사를 많이 빼버린 탓도 있고, 일제 강점기의 식민사관이 백제에 대한 내용들을 왜곡 또는 축소해버린 데에도 원인이 있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문제적 기록 태도는 흔하게 목격됩니다. 아무리 객관성을 표방하는 역사 서술이라고 해도 서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역사를 살필 때 해당 역사서가 쓰인 시대의 배경을 반드시 함께 둘러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백제는 결코 만만하고 왜소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한때 고구려 땅은 물론 요서와 일본까지 진출했던 강대국입니다.

 

(72)

도읍을 사비로 옮겼지만, 백제의 본거지는 어디까지나 한강 유역이에요. 백제가 명실상부하게 강국의 위치에 오르려면 자신의 근거지임과 동시에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 유역을 확보해야 합니다. 성왕은 백제의 근거지인 한강을 되찾기 위해 신라의 진흥왕과 손을 잡아요. 아직까지는 혼자 힘으로 고구려를 상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동맹을 통해 백제는 한강 하류를 되찾지만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을 도로 빼앗기게 됩니다. 이에 격분한 성왕이 진흥왕과 일전을 벌였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백제는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집니다.

 

(165-166)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지배층에 보내는 위험신호였어요. ‘이대로는 안 되니 개혁하라’는 일종의 주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종은 즉위 초 개혁 정치를 좀 하는가 싶더니 이내 정치를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집니다. 정치 기강은 더욱 문란해질 수밖에 없지요. 문벌귀족 역시 이겼다고 기고만장합니다. 자기들 배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문벌귀족들은 또한 군인에게 지급되던 군인전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요. 중앙군인 2군 6위는 직업군인입니다. 월급을 받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으니 군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문벌귀족들은 자신의 특권을 강화하고 권력을 집중시키느라 무신을 차별합니다. 재상으로의 승진도 제한하고, 심지어 과거시험에 무과를 두지도 않았어요.

 

(244-245)

일제는 자신들의 국권 탈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사관을 내세웁니다. 특히 조선시대 붕당정치를 두고 이른바 당파성론을 만들어냈는데요. 한국인은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가져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논점이에요. 하지만 이 붕당정치는 일본인은 해보지 못한 선진정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일본은 꿈도 꾸지 못할 정당정치가 조선 중대에 이뤄지고 있었던 겁니다. 붕당정치는 일종의 정치 투쟁인데요. 주로 상소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냈습니다. 한 세력이 독재하지 못하도록 소수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인데요. 이는 분명 정치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측면도 있습니다. 붕당정치는 공존이 바탕이 되는 정치 시스템이었어요. 이랬던 붕당정치가 왜곡으로 치달은 것은 일당전제화가 되면서부터입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 환국정쟁으로 변길되면서 폐해가 불거지는데요.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이 시기의 모습입니다. 이걸 전체로 확대 해석하여 마치 붕당정치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한국인의 국민성까지 들먹였던 거예요.

 

(346)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지만 17세기가 되자 일본과의 관계가 다시 풀리기 시작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다시 수교할 것을 요청해온 탓입니다. 1607년, 조선 정부에서는 승려 유정 등을 일본에 보내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해오게 합니다. 임진왜란 때 금강산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사명대사 유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하여 조선인 포로 1500명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376)

학문에서는 양명학과 실학이 나옵니다. 관념을 앞세우는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은 실천을 중시해요. 예컨대 사과를 하나 가져와서 “이 사과의 맛을 평가하시오”리고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성리학은 이 사과의 ‘리’는 무엇일까. ‘기’는 무엇일까, 이 사과가 맛있다고 하면 그것은 ‘기’일까, ‘리’일까 하고 자꾸만 관념적으로 해석하려 들어요. 반면에 양명학은 사과를 덥석 깨뭅니다. 먹어봐야 맛이 있는지 없는지 평가할 수 있다는 거죠. 실학은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합니다. 이는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자는 학문으로 일상생활과 밀접한 내용들을 연구합니다.

 

(400)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어요. 건국이념도 체제 유지 이념도 성리학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은 16세기 들어 절정의 꽃을 피우다가 양 난 이후 삼정의 문란과 더불어 사회의 지평이 흔들림에 따라 존립마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자주적이고 민족적이며 근대 지향적인 실학에 내어주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에겐 개혁을 이뤄낼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비주류로 묻히고 말아요. 또한 조선 후기에는 사회적으로 신분제가 동요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등 변화의 바람이 일었지만 지배층은 성리학만을 내세우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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