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 나라 모든 남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할지 말지 결정을 내릴 때는 모두가 참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찬성의 외침이 울렸다.
“법률에서는 이 나라 남자의 절반 이상에게 투표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에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27)
“누가 잘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전쟁을 벌이자는 결정을 내릴 때
참여 못한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학살당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
(92)
모드는 곰곰이 생각했다. “신문들 대부분은 여전히
솜 강 전투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척하고 있어요.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인 평가를 하려 들면 애국적이지
못하다는 식으로 낙인을 찍죠. 노스클리프 경은 정말로 군국주의 독재체제에서 살고 싶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대부분 우리 국민은 전쟁이 별 성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129-130)
이번에는 청중석에서 아까와 다른 편이 환호성을 질렀고, 피츠는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에설이 보기에는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었다. 모드가 일어서서 그 점을 지적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건 어느 한
나라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독일에 대한 비난은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잡았고, 군국주의에 빠진 우리 언론은 그런 거짓을 더욱 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마치 그 일이 정당한 이유 없이 벌어진 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육백만 군대가 독일 국경으로 이동한 사실은 잊어버렸습니다. 프랑스가
중립선언을 거부했다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몇몇이 야유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소리를 들으면 갈채를 보내기 어려운 법이지. 에설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독일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유럽의 안정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벨기에의 정의나 독일 군국주의의 처벌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실수를 인정할 수 없어서 싸우는 겁니다.
(244)
블라디므로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으로 알려진 그는
마흔여석 살이었다.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에, 몸단장에 허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쁜 나머지 깔끔하지만 고상하지는 않은 차림이었다. 한때는 머리 전체가 붉었지만 일찍
숱이 줄기 시작해 지금은 주변에 머리칼의 흔적만 남은 반짝이는 대머리였다. 세심하게 다듬은 반다이크
수염은 연한 적갈색에 회색이 섞여 있었다.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발터는 그가 매력도 없고 잘생긴
외모도 아니어서 그리 특별한 인상은 받지 못했다.
(393-394)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책 한번 본 적 없는
조지 배로는 자신이 데카르트나 렘브란트, 베토벤보다 더 뛰어나다고 느꼈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었다. 그들 모두 학교를 다니는 내내 과장된
선전을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영국 군대의 승리만 가르칠 뿐, 패배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런던의 민주주의는 가르치치만 카이로에서의 압제는 가르치지 않았다. 영국에서 실현되는 정의는 배우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행되는 태형이나
아일랜드의 기아, 인도에서의 학살은 알려주지 않았다. 가톨릭
신도가 신교도를 화형에 처한 일은 배우지만, 신교도 역시 기회만 있으면 가톨릭 신도에게 똑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빌리의 아버지처럼 선생들이 세상은 공상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아버지는 거의 없었다.
(497)
이른 새벽, 프랑스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거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차는 작은 마을을 지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역플랫폼과 철도 옆 도로에 모여 기차를 지켜보는 모습에 그는 깜짝 놀랐다. 밖은 어두웠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등 불빛 아래서 또렷이 보였다. 남녀와 아이들이 수천 명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리는 대신 매우 조용히 있었다. 남자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자를 벗었고, 경의를 표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거스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들은 세계의 희망을 싣고 지나가는 기차를 보기 위해 새벽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539)
빌리는 계속 말했다. “그럼 이제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겠습니다. 이 전쟁은 영국 의회에서 논의된 적이 없습니다. 모든
내용은 작전상 보안이라는 허울에 가려져 영국 국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군이 떳떳하지
못한 비밀을 숨길 때는 쓰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싸우고 있지만 전쟁은 선포된 적이 없습니다. 영국 수상과 그의 동료들은 독일 카이저와 그 밑에서 싸운 장군들과 똑 같은 처지입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제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빌리는 자리에 앉았다.
(563)
모드는 마침내 거울의 방에 들어섰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방들 중 하나로, 크기가 테니스코트 세 개를 붙여놓은 정도였다. 한쪽 벽에는 열일곱 개의 창문이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반대편 벽에는 열일곱 개의 아치형 거울이 창을 비추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첫번째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에게 알자스로렌 지방을 포기하겠다는 서명을
강요했던 장소라는 점이었다. 이제 독일은 바로 그 원통형의 둥근 천장 아래서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미래에 입장이 바뀌어 복수할 날을 꿈꾸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남에게 수모를 주면 머지않아 돌아오는 법이지. 모드는 생각했다. 여기 조인식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632)
“저는 그런 시절이 지났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군대뿐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빌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에 아버지가 설교할 때처럼 격정적인
흥분이 묻어났다. “이번 선거는 미래에 대한 것이고, 이
선거로 우리 아이들이 어떤 나라에서 자랄지 결정됩니다. 우리가 자랐던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서 자랄 수
있도록 확실히 해야 합니다. 노동당은 혁명을 원치 않습니다. 다른
여러 나라를 보아온 결과 혁명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진정하고 중대하고 근본적인 변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