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글은 지난 700년 동안 한민족의 정체성이고, 분단 70년이 되는 지금 남북 겨레의 공통점이다. 남북 8천 만 겨레와 해외 교포 교민 800만의 원형질이다. 이 원형질은 한국어(조선어)를 통해 공유된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우리가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한 언어는 한국어뿐이다.
(25)
국난기에 인재가 많이 나타나듯이, 같은 해에 황해도
해주에서 백범 김구가 출생하였다. 김구와 주시경은 걷는 길이 달랐으나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김구는 동학에 들어가 소년접주가 되고 신민회 참가, 105인
사건, 투옥, 해외망명, 임시정부
주석 등을 지내며 항일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에 참여한 이후 국내에서 한글과 국문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짧은 생애를 바쳤다. 독립협회 등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을 지도 모른다.
(78)
조선 글자가 페니키아에서 만든 글자보다 더 유조하고 규모가 있게 된 것은, 자모음을 아주 합하여 만들었고, 단지 받침만 때에 따라 넣고 아니
넣기를 음의 돌아가는 대로 쓰나니, 페니키아 글자 모양으로 자모음을 옳게 모아 쓰려는 수고가 없고, 또 글자의 자모음을 합하여 만든 것이 격식과 문리를 더 있어 배우기가 더욱 쉬우니, 우리 생각에는 조선 글자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학문이 있는 글자로 여겨지노라.
(81)
이렇게 규모가 있고 좋은 글자는 천히 여겨 내버리고, 그렇게
문리가 없고 어려운 그림을 애 쓰고 배우는 것은 글자 만드신 큰 은혜를 잊어버릴 뿐더러 우리나라와 자기 몸에 큰 해와 폐가 되는 것이 있으니, 배우기와 쓰기 쉬운 글자가 없으면 모르되, 어렵고 어려운 그 몹쓸
그림을 배우자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하고 다른 재주는 하나도 못 배우고, 십여 년을 허비하여 공부하고서도
성취하지 못하고 사람이 반이 넘으며, 또 십여 년을 허비하여 잘 공부하고 난대고 그 선비의 아는 것이
무엇이뇨. 글자만 배우기도 이렇게 어렵고 더딘데, 인생 칠
팔십 년 동안에 어렸을 때와 늙을 때를 빼어 놓고, 어느 겨를에 직업상 일을 배워 가지고 또 어느 겨를에
직업상 실상으로 하여 붙는지 틈이 있을까 만무한 일이로다. 부모 앞에서 밥술이나 얻어먹을 때에는, 이것을 공부하노라고, 공연히 인생이 두 번 오지 아니하는 청년을
다 허비하여 버리고, 삼사십 지경에 이르도록 자시 일신 보조할 작업도 이루지 못하고 어느 때나 배우려
하느뇨.
(151-152)
가령 동서양 사기(史記)라든지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든지
법을 규칙 같은 천만사를 모두 국문으로 번역하고 아무쪼록 국문을 연구하여 남이 알기 쉽도록 만들겠더면 사람마다 세계 형편도 알기 쉬울 것이요, 성경현전의 좋은 말과 좋은 행실을 보아서 모두 지식도 늘도 행실도 점잖아질 터이요, 내 나라 일과 남의 나라 일을 보아 분변하는 애국성(愛國性)도 생길 터이거늘, 한문으로 기록한 책만 보아야 하겠고 수 십 년을
공부하여야 성공할는지 말는지 한 한문 공부만 하여야 될 줄만 아나니,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은 아니로되
국문을 등한히 여기고 힘쓰지 아니할 것이 아니기로 두어 마디 설명 하거니와 국문이 발달되는 날에야 우리 대한이 세계에 독립부강국이 될 줄로 짐작하노라.
(155-156)
우리 반도에 태고 적부터 우리 반도 인종이 따로 있고 말이 따로 있으나 글은 없었다. 중국을 통한 후로 한문을 쓰다가 세종대왕이 지극히 밝아서, 각국이
다 그 나라글이 있어 그 말을 기록하여 쓰되 홀로 우리나라는 글이 완전히 못함을 개탄하고, 국문을 창제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으니 참 거룩한 일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그 뜻을 본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문만 숭상하여, 어릴
때부터 이삼십까지 아무 일도 아니하고 한문만 공부로 삼되 능히 글을 알아보고 능히 글로 그 뜻을 짓는 자가 백에 하나가 못 된다. 이는 다름 아니라 한문은 형상을 표하는 글일 뿐더러 본래 타국 글이므로 이 같이 어려운 것이다.
(166)
다시 해가 바뀐 1909년 2월 23일 통감부는 출판물의 원고 검열과 배일 항일 출판물의 압수를
합법화하는 출판법을 공포했다. 이 조처로 연말까지 5,767권의
민족운동 관련 책이 압수되어 소각되거나 일본으로 실려갔다. 9월 2일을
기해 일본군이 남한의병 대학살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의 씨를 말렸다. 영국 기자 F.A. 맥켄지는 일본군의 잔학상을 전하며, 번잡하고 유복했던 마을
제천이 “온전한 벽도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그릇도 하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고 보도하였다. 일본군은
의병학살에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모두 죽이고 모두 탈취하고 모두 불태우는” 야만성을 드러냈다.
(173-174)
이 마음이 없으면 몸이 있어도 그 몸이 아니요, 터가
있어도 터가 아니니, 그 국가의 성쇄도 언어의 성쇄에 있고, 국가의
존부도 언어의 존부에 있는 것이니, 그 국가의 존부에 있는 것이니, 그
국가의 존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금의 세계 열국이 각각 제 언어를 존숭하여, 그 언어를 기록하여 그 문자를 각각 자음이 다 이를 위한 것이다.
(194)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 님이 지어 쓰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나,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는 신문관
발행의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
제목으로 ‘한글’이라 한 것이 있다. 이 이름이 일반화하게 된 것은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1921년 12월 3일 창립)에서 1927년 2월 8일 창간한
기관지 <한글>을 발행한데 이어 또 훈민정음 반포 8주갑 병인면(1926) 음력 9월 29일을 반포기념일로 정하여 ‘가갸날’로 명명한 뒤, 1928년에는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1946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로 제정되면서부터라 하겠다. 그런데 이 ‘한글’이란 이름을 제일 먼저 지은 분은 신명균(1889~1941) 님이라고도 하고, 최남선(1890~1957) 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믿을 만한 말이 못된다.
(200)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뒤에야 되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