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아빠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서맨사 하비라는 사람의 처음 들어보는 소설 <궤도>라는 책이란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처음 들어보는 소설을 덥석
읽었던 것은 이 책이 작년 2024년 부커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란다.
세계 3대 문학상이라고 부르는 부커상은 약 10년
전에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수상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는데, 아빠는 그 이전에 부커상 수상작들을
간간히 읽곤 했었단다. 부커상은 원작이 영어로 된 소설 중에 주는 본상이 있고, 영어로 번역한 작품에 주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이 있단다. 이번에
읽은 <궤도>라는 소설은 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란다. 문학상 수상작을 받게 되면 그 작가를 모르는 경우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읽게 되곤 하지.
몇 달 전에 2023년 부커상 본상을 받은 <예언자의 노래>를 재미있게 읽었으니 더욱 2024년 부커상 수상작에 관심을
갖게 보았단다. 너무 기대를 했던 것인지, 일단 아빠 취향의
소설은 아니었단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부커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는데,
아빠는 공감할 수 없었단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지내는 여섯 사람의 일상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지구, 우주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영상을 글로 옮겼다는 것 이외에 신선함 마저 느낄 수 없었단다.
시적 언어를 사용하였고, 국제우주정거장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이들의 고독과 그들 사이의 유대감을 소설로 그리긴 했는데, 결국은 반전이나 극적인 사건 없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소설이었단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글로 표현했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아빠의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바꿔야 했단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유튜브로 찾아보는 영상보다 나은 지 잘 모르겠더구나. 아무튼 아빠의 취향이 아닌 소설을 활자 하나하나 곱씹어 읽으면서 책의 마지막을
펼쳤단다.
그래도 읽는 내내 어떤 극적
사건이나 반전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읽어서, 책 중반까지는 책에 등장한 멋있는 문구들의 페이지를
꽤 적어 두었는데, 그것이 그것으로 그쳐버린 점이 아쉬웠단다. 읽은
이들의 평가를 보면 여운이 깊다거나 잔잔한 울림을 준다고 하는 글도 있는데, 아빠의 감성 그릇에는 절반도
채워지지 못했단다.
1.
그래도 소설의 내용은 몇 자
긁적여 봐야겠구나. 국제우주정거장에 여섯 명이 머무르며 근무하고 있었어. 선장인 로만과 안톤은 러시아 출신이고, 숀은 미국, 피에트로는 이탈리아, 넬은 영국,
치에는 일본 출신의 연구자들이란다. 로만, 숀, 넬은 3개월 전에 합류했단다. 지구를
돌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하루라는 개념은 24시간으로 정의하고
있단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을 볼 수 있단다. 멋진 일출과 일몰을 보려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하루에 열여섯 번씩 볼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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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들은
우주가 날짜 감각을 없애려 한다는 것을 느낀다. 우주는 말한다. 날이
대체 뭔데? 스물네 시간의 하루를 지키려 하고, 지상 근무원들도
계속해서 그 점을 일깨워 주지만, 우주는 스물네 시간을 열여섯 번의 낮과 밤으로 돌려준다. 그래도 이들은 악착같이 스물네 시간을 산다. 시간에 매여 사는 허약하고
작은 몸이 아는 게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잠을 자고 변을 누고, 모든 게 거기 묶여 있다. 하지만 첫 주가 지나기도 전에 마음은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하루 개념이 없는 기이한 영역으로 풀려나가 질주하는 지평선 위를 타고
넘는다. 분명히 낮인데 밀밭에 몰려드는 먹구름처럼 밤이 찾아오는 것을 본다. 그러다 45분이 지나면 또 낮이 찾아와 태평양이 깔린다. 과거에 생각했던 전혀 다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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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구를 하루에 열여섯
번씩 관찰을 하다 보니, 지구의 아름다움 곳곳을 볼 수 있단다. 그런
지구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해주고 있는데, 읽는 이는 다시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변환시켜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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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처음에
이들은 밤 풍경에 매료되었다. 화려한 도시 불빛을 외피에 두른 지구는 인간이 만든 것들 것 황홀하게
빛난다. 도시 태피스트리가 두껍게 수놓인 밤의 지구는 또렷하고 선명하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유럽 해안지대에는 1마일이 멀다 하고 사람이 산다. 유럽 대륙 전체가 도시 별자리들과 황금빛 도로 실들로 아주 정교하게 엮여 윤곽을 드러낸다. 황금 실들은 눈이 내려 가의 언제나 회청색으로 보이는 알프스산맥까지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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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풍이 발생하면 태풍의
정보를 지상으로 전해주어 태풍의 피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기도 해.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자신들이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지구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우주 속에서 바라봐 보면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티끌 같이 작은 지구 안에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겠냐 말이야. 아빠가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아빠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우주를 생각하곤 한단다. 이 광활한 우주의 공간과 시간을
생각하다 보면 아빠의 스트레스는 너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야. 그런 것들을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생활하다 보면, 금방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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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30)
그러다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이들은 지구를 보다가 진실을 마주한다. 정치가
정말로 촌극인 게 아닌가. 정치는 그저 터무니없고 어리석고 가끔은 정신 나간 쇼일 뿐이며, 그걸 제공하는 인물들은 어느 구석이라도 혁명적이거나 혜안이 깊거나 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세고 과시에 능하고 뻔뻔하게 권력 싸움을 갈망했기에 그 자리까지 오른 자들 아닌가.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해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은 정치가 촌극이 아님을, 촌극에만 그치지 않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정치는 아주 거대한 힘이어서, 우주에서 봤을 때는 인간의 힘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지상의 모든 것을 일일이 다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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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인간의
욕망이라는 실로 놀라운 힘이 지구를 형성한다. 그 힘이 모든 걸 바꿨다. 숲, 극지방, 저수지, 빙하, 강, 바다, 산, 해안선, 하늘을, 욕망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고 조경된 행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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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의 글로 소설은 끝을
맺는단다. 초반부에는 내심 우주정거장 내에서 한 사람이 피살당하고 다섯 명 사이에서 범인을 찾는 심리스릴러를
기대했다가, 중간을 넘어 가면서, 그들이 생활하던 곳은 사실
작은 원자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는 반전을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다큐멘터리로 끝이
났단다. 아빠가 SF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보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영화 <그래비티>가 많이 생각났단다. 우주정거장에서 사고가 나서 살아남은 한 명의 우주의 생존 투쟁을 그린 영화로 스토리 상으로는 이 소설과는 상관성이
전혀 없지만, 우주에서 바로 본 지구의 영상들이 많이 등장하여 그런 생각이 든 것 같구나. <그래피티>라는 영화를 너희들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조만간 한번 같이 보자꾸나.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다 보면 너무 함께이고 또
너무 혼자여서 생각과 내면의 신화조차 이따금 한데로 모인다.
책의 끝 문장: 짧은 순간에 모여 하나가 되고는, 거칠고 경쾌한 세상의 잡음 은하계 목관 악기 트랜스 음악으로 요란하게 뒤죽박죽 다시 흩어진다.
외계 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맴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지구는 환희에 찬 연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가 잠들었다 깨어나고 자기 버릇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지구는 이야기와 기쁨과 그리움을 잔뜩 안고서 아이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다. 이들은 뼈의 밀도가 조금 낮아지고 팔다리가 조금 가늘어진다. 눈에는 뭐라 말하기 힘든 광경들이 가득하다.- P10
몽골이나 러시아 동쪽 끝 황무지에 사는 사람이라거나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누구도, 싸늘한 오후인 지금 비행기가 다니는 길보다도 더 높은 하늘에 우주선 한 대가 지나고 있으며, 거기 타 있는 인간이 무중력의 유혹에 굴복해 근육을 잃지 않기 위해, 새처럼 떠다니며 뼈를 다 소실하지 않기 위해 다리 힘으로 열심히 리프트 바를 들어 올리고 있다고는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렇게 힘쓰지 않으면 가엾은 우주여행자는 지구로 되돌아가 다리라는 게 다시 중요해졌을 때 온갖 문제를 겪게 된다. 열심히 들어 올리고 땀을 흘리고 밀어내지 않으면, 재진입할 때의 맹렬한 열기와 충격은 이겨 내더라도 캡슐에서 내릴 때는 한 마리 종이학처럼 맥을 못 춰 끌어내려질 것이다.- P24
우주에서 6개월을 보내고 나면 엄밀히 말해 지구에 있는 사람보다 0.007초 덜 늙는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5년, 10년은 더 늙는다. 현재로서는 그렇게 이해할 따름이다. 시력이 약해지고 뼈가 삭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데도 근육이 위축될 것이다. 피가 엉기고 뇌액의 흐름이 달라진다. 척추가 늘어나고 T세포는 재생에 애를 먹는다. 신장 결석이 생긴다. 이곳에서는 입맛도 잘 돌지 않는다. 부비강은 죽을 맛이다. 고유감각이 흐려져 눈으로 보지 않고는 신체 부위가 어디 달렸나 알기 힘들다. 몸이 이상하게 생긴 체액 자루가 된다. 체액이 상체에는 너무 쏠리고 하체에는 부족해진다. 안구 뒤쪽에도 몰려 시신경을 압박한다. 수면이 반란을 일으킨다. 장내미생물군이 새로운 박테리아를 키운다. 암 발병 위험이 올라간다.- P49
50년 넘도록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 우리의 달은 인간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리운 마음에 지구를 향해 밝은 면을 내보이고 있는 걸까? 우리의 달 그리고 다른 모든 달과 행성과 태양계와 은하계도 알려지기를 갈망하고 있을까? 떠난 지 사흘이 채 되지 않은 내일이 오면, 이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인간 존재들이 가루로 덮인 달 표면에 귀환할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세상에 나부끼는 깃발을 꽂고 싶어 하는 존재들, 집요한 마시멜로들, 두둥실 하늘을 떠다니는 선원들은 자기네 깃대가 쓰러지고 성조기가 해진 것을 발견하리라. 50년 동안 자리를 비우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 세상은 당신 없이 계속 돌아간다. 우주비행사 네 명은 그렇게 해변 막사에서 잠을 청했다. 눈을 뜨면 새 시대가 도래하리란 것을 알고서.- P57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하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재사용하고 공유한다. 우리는 갈라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그럴 수 없으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오줌을 재활용해 마신다. 서로가 뱉은 숨을 재활용해 숨 쉰다.-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