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할 책은 몇 달 전에
아빠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이란다. 책 제목은 인터넷 서점을 서핑하다가 본 적이 있는 <불안의 책>이라는 책이야. 지은이는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포르투갈 사람인데, 아빠는 처음 알게
된 사람이란다. 이 사람은 잡지를 출간하기도 하고, 번역가로
일하기도 하고 출판사 겸 무역회사를 차리기도 했대. 자신이 만든 출판사를 통해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
있다는 작가들의 작품을 출간해서 나라로부터 경고를 먹기도 했대. 정작 자신은 살아 생전에 책을 많이
출간하지는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출간하지 않은 그의 원고가 발견되었는데, 그 양이 2만 7500장이나
된다고 하더구나. 페르난두 페소아를 연구하던 이들이 그의 글들을 정리하여 출간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죽은 후에야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대.
아빠가 이번에 읽은 <불안의 책>도 그가 남긴 원고들 중에서 미완성 원고들을
엮은 책이란다. 그래서 편집본마다 글의 수와 순서가 조금씩 다르다고 하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이 책이 번역 출간된 이력이 있는데, 모두 중역본이었고, 아빠가 이번에 읽은 책이 리처드 제니스의 포르투갈어 편집본 원전을 완역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다른 이름으로 글을 쓴 것처럼 글을 썼다고 하는구나. <불안의 책>도 지은이가 우연히 알게 된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사람의 글을 알게 되어 소개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지은이 페르난두 페소아의 생각이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불안의 책>은
191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 약 20년 동안 틈틈이 썼던 글을 모은 것이란다. 앞서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가상의 인물의 글로 설정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책의 부제는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작품’이란다.
1. 촌철살인
이 책을 너희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주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하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20년
동안 틈틈이 적은 글이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481개의 글들은 각각 독립적인 글들이란다. 굳이 순서를 두고 읽을 필요는 없으며, 읽다가 나랑 맞지 않으면
다음 글로 건너뛰어도 된단다. 정말 짧은 글은 한 줄로 끝나는 것도 있고, 긴 글은 몇 장에 걸친 글들도 있단다. 그렇다고 짧은 글이 가치도
없는 것이냐? 그것은 아니고 오히려 짧은 글들은 촌철살인의 글들이었어.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글. 사랑에 대해 이렇게 짧으면서 완벽한 글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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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죽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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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는 주체는 지은이
페르난두 페소아가 만들어낸 가상인물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란다. 그의 직업은 회계사이고 그의 회사가 있는
곳은 리스본 도라도레스라는 거리란다. 그는 늘 도라도레스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으로 하면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세상을 여행하고 삶을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의 글들 내면에는 아빠가
느끼기에 약간의 비관주의와 약간의 염세주의가 담겨 있었단다. 그런 글들 내면에 불안이 조금씩 담겨 있었기
때문에 책제목을 <불안의 책>이라고 하지 않았나, 싶구나.
....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는 동시에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단다. 아빠가 책을 읽을
때 좋은 구절이 있으면 그 페이지를 책의 앞면지에 적어두곤 한단다. 그리고 그 글들을 키보드로 두들기면서
다시 한번 음미한단다. 그런데 이 책의 앞면지에 정말 수많은 페이지들이 적혀 있단다. 아마 아빠가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적은 페이지 개수 신기록을 세웠을 거야.
그리고 그 페이지의 글들을 다시 키보드로 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단다. 그런데 이걸
키보드로 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손으로 써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단다. 그의 글들이 약간은 불안을 담고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라서 배우고 싶었거든. 그의
글을 따라 적다 보면 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
이 책의 좋은 부분이 많지만, 몇몇 더 좋았던 부분을 발췌하는 것으로 오늘 독서 편지를 대신하련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책의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단다. 그냥 천천히 정독하면서 책 전체를 그대로
느껴보는 것을 추천해 본다. 물론 너희들은 이다음 큰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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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다리를 저는 내 이웃의 정원에 놓인 하나뿐인 화가에 핀 조그마한 식물처럼. 그 화분은 내 이웃에게 기쁨을 주며, 때로는 나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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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요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이 비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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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아, 내 안에 살아 있고 내 안이 아니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죽은 과거여! 들판의
작은 집 정원의 꽃들은 오직 내 안에만 있구나! 뜰의 채소와 과일나무와 소나무들은 오직 내 꿈속에만
있구나! 내가 상상한 전원생활과 시골 산책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어라! 길가의 나무와 오솔길과 돌 들, 지나가던 시골 사람들…… 모든 것은 단지 꿈이었을 뿐, 내 기억에 새겨진 채 나를 아프게
한다. 그것들을 꿈꾸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던 나는 지금은 꿈꾸던 순간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사실은 나의 진정한 그리움이자 나를 눈물짓게 하는 과거이고 죽어버린 진정한 삶이다. 나는 그 삶이 엄숙하게 관에 누운 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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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나는
국가와 인류에 종속되길 거부한다.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한다. 국가는
나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꼼짝 않는 이상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오늘날 사형제도도 폐지되었으니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나를 귀찮게 하는 정도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영혼을 더욱 단단히 무장하고 내 꿈속 더 깊은 곳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국가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운명이 나를 봐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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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
오늘
나는 거리를 걷다가,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었던 두 친구를 따로 마주쳤다. 각자가 왜 상태에게 화났는지 내게 말해줬다. 둘 다 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둘 다 자신의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둘 다 옳았다. 둘 다 틀림없이 옳았다. 한 명은 이것을 보고 나머지 한 명은 다른
면을 보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발생한 일의 진상을 정확히 보고 있었고, 모든 같은 기준에 근거해 사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둘은
뭔가 다른 것을 보았고, 결국 둘 다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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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나를
찾는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렸고, 내가 찾아낸 것은 의심스러우며, 내가
얻었던 것은 이미 내게 없다. 나는 길을 걷듯 잠을 자지만 사실은 깨어 있다. 나는 잠을 자듯 깨어 있고, 나는 내게 속해 있지 않다. 결국 삶이란 근본적으로 거대한 불면이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의식이 또렷한 인사불성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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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여행은
독서와 같고, 독서는 다른 모든 것과 같다…… 나는 고전과
현대물이 고요히 공존하는 박학다식한 삶을 꿈꾼다. 그 삶에서 나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통해 내 감정을
새롭게 할 수 있고 명상하는 이들과 대체로 생각만 했던 자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한데, 그들 사이의 모순에 기반한 사고로 나 자신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에 대한 이러한 꿈은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들자마자 사라져버리고, 책을 읽는 실제 행위는
읽고 싶다는 모든 욕구를 없앤다…… 마찬가지로 어쩌다 기차역이나 항구 같은 출발지에 가까이 가는 순간, 여행에 대한 모든 상상은 창백하게 시들어버린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확실한 두 가지, 나처럼 아무 가치 없는 두 가지로 돌아온다. 바로
아무도 모르는 나그네 같은 나의 일상, 그리고 잠들지 못한 자의 불면증 같은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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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
시간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간을 재는 정확한 척도가 무엇인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시계로 시간을 잰다는 건 외부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나누는 것이므로 가짜다. 감정으로 시간을 잰다는 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감각을 재는 것이므로 역시 가짜다. 꿈에서 시간을 재는 건 역시 잘못됐다. 꿈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시간을 스칠 뿐이고,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흐름 속의 무언가로 인해 바쁘거나 느리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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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인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는 실험적인 여행이다. 물질을 통해 떠나는 정신의 여행이고, 여행하는 것은 정신이므로 우리는 정신 안에 산다. 그러므로 외향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더욱 강렬하고 폭넓고 격동적으로 사는, 관조하는 영혼이 있다. 중요한 건 마지막 결과다. 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그가 살았던
삶이다. 육체노동을 한 다음처럼 꿈을 꿀 때도 사람은 피로해진다. 어느
누구도 머릿속으로 깊이 생각할 때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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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
신문을
읽는 것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항상 불쾌한 일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도 종종 그러하다. 심지어 도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전쟁
아니면 혁명이 항상 신문에 나오는데, 전쟁이나 혁명이 미치는 영향을 신문에서 읽다보면 공포보다도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읽다보면 우리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그
모든 죽음과 부상의 잔인함이나 싸우다 죽은 자들 또는 싸우지도 못하고 죽은 자들의 희생이 아니다.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들 때문에 인명과 재산을 희생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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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리스본에는 제법 품격 있는 주점 이층에 자리잡고 꽤
알찬 가정식 식사를 내놓는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일, 내가 느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일상의 거리에서 사라진 한 명의 행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