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 가을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한강 작가님이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던 일이 있단다. 그런데 그날 러시아에서도
또 하나의 문학계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단다. 우리나라 출신 미국 교포인 소설가 김주혜 님이 데뷔작 <작은 땅의 야수들>이라는 작품이 러시아 최고의 문학상인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냥 한국계 미국인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탔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수상작인 <작은 땅의 야수들>이 우리나라 일제 시대 역사를 다룬 소설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단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도 좋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작품으로 일제 시대의 우리나라 역사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단다. 아빠도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이미 몇 년 전에 읽었단다. 아빠가 읽은 책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아빠도 무척 기뻤단다.
김주혜 작가님이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하신 이후 한국에 오셔서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신 것을 보았는데, 어렸을 때 미국 이민을 가셨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계셨고, 본인 스스로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했어. 그리고 털털하신 것 같으면서 말도 솔직하면서 시원하게, 그러면서 조리 있게 잘 하시더구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뷰를
봤어. 그래서 김주혜 작가님의 다른 인터뷰들을 여럿 찾아보고, 팬이
되었단다. 당시 두 번째 작품이 미국에서는 출간되었다고 했었는데, 얼마
전에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단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서 읽었단다. 두 번째 장편 소설은 발레에 관한 이야기란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발레에 전문지식이 없다면 쓸 수 없는 깊이의 소설이었단다. 아빠는
발레에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발레의 전문 용어와 발레의 사람들의 생활 패턴 등을 깊이 있게 이야기를
하셨어. 김주혜 작가님이 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렸을
때 발레를 조금 하셨다고 하지만, 커서도 따로 발레 전공을 하셨나 싶을 정도였단다. 아빠는 발레에 관한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 듯 하구나.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발레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어려우면 어쩌나 싶었는데, 김주혜
작가님의 글발로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텍스트로만 되어 있지만 발레를 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발레단의 일원으로 옆에서 그들의 공연과 사랑을 본 듯한 느낌도 들었단다.
1.
주인공은 나탈리아 레오노바 니콜라예브나. 러시아 이름은 참 길고 어려워. 아빠는 그냥 애칭인 나타샤로 부를게. 사고를 당하고 발레를 그만 둔 지 2년. 정말 오랜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단다. 오래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발레를 했었어. 나타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이유는
돌아가신 엄마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함이었어. 그런데 오래 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함께 일했던 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를 우연히 만나고, 드미크리는 나타샤에게 복귀를 제안하면서, 지젤 역할을 제안했단다.
상대 남자는 한국인 김태형이란
사람인데, 지은이 김주혜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의 이름을 따왔다고 했어. 나타샤도 다시 발레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연습장에서 클래스를 해 보는데 아직 다리와 발에 통증이 느껴졌단다. 드미트리는 나타샤에서 재활을 위한 개인 교습과 물리치료를 제안했단다. 개인
교습은 스베타 이모가 해주기로 했단다.
….
자, 이제 나타샤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자꾸나. 1992년
일곱 살이던 나타샤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었어. 엄마는 남자에게 버림 받은 미혼모였고, 재봉사로 일하고 있었어. 나타샤의 이모 스베타가 발레리나인데, 나타샤의 점프 능력이 타고난 것을 알고 발레를 배우라고 해서 발레를 시작하였어. 나타샤의 점프 능력과 발레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바가노바 발레학교 오디션에서 합격을 했단다. 이 때 단 두 명만 합격했는데, 베레지나(니나)와 나타샤가
그들이었어. 이 일로 둘은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후 계속 친하게 지냈단다.
나타샤는 소피아라는 사람이 룸메이트였어. 나타샤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경쟁 관계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단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세료자도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나타샤, 니나, 세료자는 학교 대표로 경연 대회에 참석했는데, 안타깝게 그랑프리를 놓쳤지만, 나타샤는 여자 금메달을 수상하였단다. 그랑프리는 니쿨린이라고 하는 우크라이나 발레리노였여.
…
나탸사는 발레학교를 마치고,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했어. 세료자도 같이 입단했는데, 둘이 우정은 이제 사랑으로 발전하여 함께 지냈단다. 그들의 사랑은 3년간 유지되거나 다시 우정으로 돌아갔단다. 나탸사의 발레 실력이
타고나기도 했지만, 정말 열심히 했단다. 그리고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드디어 그랑프리를 수상했단다. 그러자 볼쇼이 발레단에서 섭외 제안이 들어왔단다. 그것도 수석 무용수 대우를 해준다면서 말이야. 아빠가 발레를 잘
모르지만, 볼쇼이 발레단은 워낙 유명하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발레단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 나탸샤는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 거야. 그 볼쇼이 발레단에는
오랜 전 참석했던 경연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탔던 니쿨린도 있었어. 니쿨린의 애칭은 샤샤이니 이제 샤샤라고
부를게. 나타샤는 샤샤와 친해지게 되면서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어.
…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중에 올가라는 사람이 있는데, 발레로서는 전성기가 지난 서른일곱 살이었어. 그래서 새로운 시즌이 되면서 주인공 자리를 놓치게 되었는데, 그러자
시골로 잠적하는 일이 일어났어. 남자 수석 무용수 드미트리, 샤샤, 나타샤는 직접 올가를 찾아가 설득을 했단다. 여자 주인공의 역을
나타샤와 올가가 나누어서 하기로 하고, 나타샤는 드미트리와 짝을 맞추고, 올가는 샤샤와 짝을 맞추기로 했어. 나타샤는 발레리라로서는 최상의
나이대로 들어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단다. 돈도 가장 많이 받는 발레리라 중에 한 명이었어.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나타샤에게 새로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단다.
2.
또 하나의 세계 최고 발레단인
파리 발레단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단다. 당시 샤샤와 사귀고 있던 나타샤는
샤샤도 함께 입단하는 조건으로 파리 발레단에 입단하기로 했단다. 그렇게 나타샤와 샤샤는 파리로 오게
되었어. 계속된 발레 공연과 연습 때문인지 나타샤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발에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이로 인해 휴식 기간을 갖게 되었어. 샤샤는 발레뿐만 아니라 모델
일도 같이 해서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어. 그 즈음 샤샤는 나타샤에게 공식적으로 청혼을 하여
약혼식을 치렀고, 그들은 이제 공식 커플이 되었단다.
샤샤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했잖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군사 긴장 상태에 대해 친러시아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어. 친우크라이나 성향은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그런 발언을 했으니 더욱 논란이 되었지. 언론은 그에게 해명 요구를 했고, 그 불똥은 나타샤에게까지 튀었어. 이 일로 나타샤와 샤샤는 말싸움을 벌였고, 급기야는 주먹질까지 했단다. 샤샤와 관계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어.
…
어느날 아버지의 친구라면서 파벨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 그러면서 나타샤의 아버지의 지난 이야기를 했단다. 나타샤의
아버지 이름은 니콜라이고, 그가 어떻게 살았고, 마리아 칼라스의
찐 팬이라는 것도 이야기하고 어떻게 엄마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이야기를 해주었어. 지금은 어딘가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어. 하지만 어디서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단다.
…
그러던 어느날 나타샤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단다. 우연히 샤샤와 드미트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거야. 샤샤가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배신감에 충격을 받은 나타샤. 우연히 그 장면을 보았기에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단다.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일어나서인지, 공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자전거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발과 정강이
골절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아무리 힘든 개인적인 일이 일어났지만, 프로정신이
좀 부족했던 것 같구나.
이번 부상은 엄청 큰 부상으로 1년 넘게 치료를 하다가 결국은 은퇴까지 고려하게 되었단다. 안 좋은
일에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그 와중에 고향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어. 어머니 장례식장에 가려고 했으나, 예전에 러시아 정부 인사와 접촉했다는
의혹으로 출국금지까지 내려져서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참석하지 못했단다. 나타샤에게는 파리 생활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을 것 같구나. 부상과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 어머니의
죽음… 더 이상 발레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잠시 발레계를 떠나게 된단다.
3.
2년이 지나고, 소설의
첫 장면처럼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게 된 거야.
…
오랜 만에 연락이 닿은 니나가
호텔로 찾아왔단다. 니나는 결혼하여 아이도 두 명이 있는데, 여전히
발레를 하고 있었어. 나타샤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지젤 공연을 6일 앞두고 상대역인 김태형이 폐렴에 걸리고
말아서 대역이 필요하거나, 대역을 찾지 못하면 공연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드미트리는 태형의 대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샤샤 밖에 없다고 했어. 샤샤가
안 된다면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단다. 나타샤가 샤샤와 안 좋게 헤어졌지만, 사랑은 사랑이고, 발레는 발레라고 생각하고 나타샤는 결국 같이 하기로
했어.
나타샤와 샤샤 모두 이런 대작의
주인공을 맡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어. 둘은 발레에 있어 전성기를 지난 나이였으니까 말이야. 다시 만난 나타샤와 샤샤. 샤샤는 지난 일을 진심으로 사과했어. 드리트리와 일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성이었다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타샤라면서 재결합의 의사를 보였단다. 나타샤도 샤샤의 진정성을 알았지만, 나타샤는 샤샤와 재결합은 거절했단다. 하지만 발레 파트너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전성기 마지막 공연을 잘 마무리한 것 같았단다. 5년이 다시 흐르고,
나타샤는 이제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었단다. 그렇게 소설은 마무리되었단다.
…
책을 읽고 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주고, 아빠의 기억도 더 정확하고 오래 저장할 수
있을 텐데, 책 읽고 한참 있다가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헛갈리는
내용들이 많구나. 나중에 너희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아빠가
이야기해 준 부분 중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고 이해 바란다. 아빠의 잘못된 기억력으로 잘못 이야기한 것
같으니 말이야.
이 책은 지은이가 한국계 미국인이었지만, 러시아가 주무대이고, 주인공들이 러시아 사람이라서 러시아 소설 같은
기분이 들었단다. 지은이 김주혜 작가님도 그런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는구나. 이 소설의 주요 무대인 상테페테르부르크를 검색해 보니 이국적인 모습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 여전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여전하지? 하기야 전쟁이
아니더라도 가기는 쉽지 않겠지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얼른 끝났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그리스 조각상들이 양쪽으로 전시된 갤러리에서 걸음을 멈춘다. 조각상 사이에 놓인 초록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코발트빛 하늘이 점점 보랏빛과 장밋빛으로 물들어 간다. 황혼은 일출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느려지는 것을 느낀 곳은 여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밖에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객차처럼 순서대로 흐르지 않고 서로서로 반투명하게 겹쳐져 있다. 몇 년 전의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고, 내일은 몇 년 뒤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P19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과 친밀함을 나누고, 웃고, 서로 호의를 보였으며, 좋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러나 다음 극장에서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나면 더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 달 동안 내 상상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들도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 안에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 머리와 가습에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기 때문에 나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친구들을 그리워하던 나조차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