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조론>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써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영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63)
최승호 교수는 <청록집>에 실린 조지훈의 시를 분석한다.
“조지훈은 우주를 보편생명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 이 보편생명의 흐름 속에서 진선미를 구하고, 거기서 시정신을 건져
올리려 하고 있다. 또한 인간 자신을 보편생명 속에 잘 조화되어 있는 개별생명으로 보고 있다. 보편생명의 일부로서의 개별생명은 절대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선한 개별생명과 보편생명 사이의 교감으로 미가 발생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그의 서정시학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파시즘이 이 나라를 점령한 시점에서는 하나의 방법적 대응전략일 수가 있었다. 이는 마치 2차대전 전후에 생명사상을 가지고 나와서 그것으로써 파시즘과
대결하려고 했던 중국의 동방미(東方美)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파시즘이 지닌 가공할 만한 파괴력에 맞서서, 인간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모든 생명의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조지훈의 초기시학이 출발하는 것이다.”
(74)
조지훈은 반대편이었다. 일제말기 수많은 문인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귀축영미’를 저주할 때, 그는 침묵하거나 순수시를 통해 조선의 전통과 불교적 선(禪)에 심취하였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너도나도 인민과 조국, 계급을 주창할 때도 자신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11)
다시 시란 무엇인가. 지난 번에는 자연과 인생을
통해서 보는 시전통의 생명적 본질에 대해서 생각한 나머지 나는 시를 하나의 도(道)라고 보고 인간의식과 우주의식의 완전일치의 체험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시의 생명을 체험하는 자로서 시인은 자연의 사랑을 인생의 괴로움에 통하게
하고 인생의 괴로움을 자연의 사랑에 통하게 하는 창조적 계기를 찾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시인은
무엇으로 시를 창조하는 것인가. 창조는 형수(亨受)와 구현의 합치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내용과 형식이 융합된 상태이다. 그러면
무엇이 시인의 안에서 시를 형수하고 시를 구현하는 것인가. 나는 먼저 보람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저 자신의 사상을 가질 것과 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저 자신의 사상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시를
위한 사상의 재편성이란 말은 다시 말하면 사상의 감성화라는 말임을 미리 말해 둔다.
(127)
고루거각이 어찌 나의 멋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멋 아닌 멋으로 멋을 삼아 법당을 돌고 싶으면 법당을 돌고, 염주를 세고 싶으면 염주를 세고, 경(經)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으며, 때로 눈을 들어 먼 신을 바라고 때로는 고개 숙여 짐짓 무엇을 생각나니 나의 선(禪)은 곧 멋밖에 아무것도 없는가 보다. 오늘을 모르는 세상에 내일을 생각함은 어리석은 일일러라. 내일을
모른다 하여 오늘에 집착함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러라.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도우려고도 않아 들녘에 피었다 사라지는
이름 모를 꽃과 같고자 하노라.
(135)
1950년대 고래대학교 국문과 제자들 사이에는 ‘지다(知多)’ 선생으로
통하셨다는 이야기를 제자분들로부터 들었다. 워낙 박학다식이라서 지어 올린 별호였다고 한다. 그때도 아버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 위에다 내 성(姓)을 올려놔 봐. ‘조지다’가 되는군”
좌중이 박장대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68)
조지훈은 변절행위를 매섭게 질타한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은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
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를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189)
조지훈은 4월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혁명 대열에 직접 참여하고, 혁명 후에는 이의 성공을 위해 다른
지식인들이 하기 어려운 발언을 쏟아냈다. 이 논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조용히 힘을 기르라. 먼저 황폐한 학원을 재건하고 출발전야의 제2공화국이 제군의 피를
헛되이 하지 못하도록 깨끗하고 거창한 압력을 주라. 반동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하여 그들을 국민 앞에
고발하고 주권자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선두에 나서라. 무엇보다 먼저 제군들이 그것을
분별하는 눈을 마련해야 하고, 제군들이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제군들의 고귀한 피가
또 한 번 뿌려져야 할 때야 올런지도 모른다는 의구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 불행이 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는 제군의 발언권이 증대되어야 하고, 그 발언권은 제군들이 자중하는 위의와 단결과 정화 속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191)
조지훈은 이 시기 누구 못지않은 영향력 있는 논객이었다.
“혁명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참으로 혁명정신은 지하에서 통곡하고 병원의 베드 위에서 저주하고, 학원의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침통한 우수와 뉘우침의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오직 순정과 의분으로 혁명에 임했던
학생들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자족하고 물러설 때 식자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그런 자세가 어쩌면
새로운 혁명의 전형으로서의 영예를 성취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마침내 바로 그대로 맹점이 되고 말았다. 혁명정신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다”는 속담대로 피는 학생들이
흘리고 공은 정치가들이 따로, 민중의 신임은 혁명대변 세력이 받고, 칼자루는
반혁명 세력이 쥐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바로 인세무상(人世無常)의
그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 준다.”
(214-215)
조지훈이 5.16 초기에 군사쿠데타를 수용하고 재건국민운동의
‘요강’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재론은 변함이 없었다. ‘요강’의 <혁명은 이 나라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에서 다섯 가지 인재의 자격론을 피력한다.
“첫째, 지조가
굳고 신념이 있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사상적으로나 행동적으로 변화의 재주가 넘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둘째, 식견이 있고 경륜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문제의 한 부분의 연구도 없는 사람과 자기의 포부를 실천할 경륜이 없는 사람은 백해무익이다.
셋째,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부패가 오늘의 위기를 조성한 것을 생각하면 그까짓 하찮은 권모술수를 가지고 정치적 역량인 듯이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부류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넷째, 정성스럽고 삼가면서도 과단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성이 모자라면 세밀하지 못하고 허술하다. 판단성이
없으면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고 시작해야 할 것을 때를 놓치고 만다. 망설이다가 망치지 않으려면
박력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제 먹을 것을 가진 사람, 가난을 알면서도 가난에 포원이 지지 않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 무식하고
돈 없는 자들이 국회의원이 되자니 무슨 짓이든 해서 되어 가지고는 그 벌충으로 들인 밑천을 뽑아내자니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무슨 수가 있는가. 가난을 모르면 백성의 마음을 모르기 쉽다. 그러나 너무 가난에 포원이
된 사람은 돈과 권력의 유혹에 약할 뿐 아니라 생각이 편벽된다.”
(239)
이 길이든 저 길이든, 우리가 찾는 길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가장 적합한 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길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풍토에 맞추어 우리
손으로 닦은 길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대원칙이지만, 이와 같은 길은 기성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힘이
혐오하고 저해하고 봉쇄하고 파괴하려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상이 닦아 놓은 길이든 외국 사람이 닦아
놓은 길이든 간에 그것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로 선택할 때는 대폭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255)
<20세기의 한국>을 조감한다는 것은 곧 우리 근대문화의 거의 전 과정을 부관(俯觀)하는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희랍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경구로서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알려진 교훈이거니와 오늘의 한국-우리들의 민족적 자아의 모습을 찾는데 일조가 될까하여 이 책을
엮었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는 없다. 역사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거울에 비친 20세기 세계사상의 한국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자아는 각자가 체득할 수밖에 없으니 제 모습을 찾는 일깨우는
것만으로 이 책의 사명은 다한다고 할 수 있다.
(260)
‘멋’이란
말이 ‘미적인 것’의 한 특수한 형상으로서 한국 민족의 예술적
생활의 표현 목표와 이념 또는 미가치의 한 표준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멋’은 오랜 세월은 두고 우리 민족의 미적 체험속에 체득되고 제작과 행위에서 수련되어 왔기 때문에 ‘멋’에 대한 취미성과 감수성은 우리 민족의 민중생활 일반에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멋’이라는 특수한 미에 대한 감수성과 취미가 한국적 미의식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미적개념으로서의 ‘멋’의 본질 내용은 지극히 불분명하고 더구나 그것의 한국적 미의식의
구조상의 위치와 관계 내지 의미에 대한 이론적 반성과 고구(考究)는
일찍이 있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적 미의식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멋’의 위치를 찾고, 아울러
미적 범주로서 ‘멋’의 내용과 나아가서는 생활이념으로서의
멋의 지향을 밝혀보려는 것이 본고가 의도하는 바 주체이다.
(296-297)
절정
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어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
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
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
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문득 한 마리 흰 나비! 나비! 나비!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絶命)하기에
- 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邪)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