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버지, ……아버지, 제발, 제발 내려오지 마세요. 만나서
당하는 비극보다 만나지 않고 그냥 그리워하며 사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북에서는 왜 자꾸 사람들을 내려보내는지 모르겠어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선가요? 그건 남쪽을 너무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6.25를 겪고 난 남쪽 사람들은 공산당이나 사회주의를 너무 무서워하고 싫어합니다. 나라에서 감시하고 처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6.25를
통해 북쪽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며 공산당을 싫어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 사람들을 내려보내 무슨 효과를 보지는 겁니까. 여기 있는 가족들만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95)
“정치란 마술 같은 면이 있고, 특히 기회 포착이 중대합니다. 국민이나 대중들은 순진한 관객이구요. 마술사가 연달아 실수하면 관객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특별법을 지연시킨
건 분명 잘못이고, 그걸 당장 만들 수는 없고, 국민들 마음은
급하고, 그렇게라도 임시방편을 하지 않으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큰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한 의원님이나 저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서 따낸 당선인데, 일도
못 해보고 밀려날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189)
이규백은 핏빛 낭자한 동백꽃들을 바라보았다. 한
많은 여자의 넋이 환생했다는 꽃. 그래서 저리도 선연한 핏빛으로 곱고,
처연한 느낌으로 아름다운지도 몰랐다. 바람결에는 아직 찬 기운이 서려 있는데도 동백꽃들은
어느 꽃보다도 먼저 서둘러 피어나고 있었다. 겨울 내내 푸르렀던 잎들은 봄기운을 타고 한결 싱싱한 초록빛으로
돋아오르고, 그 초록색에 떠받쳐 동백꽃 송이송이는 더욱 붉고 선명했다.
동백꽃은 색깔이 붉되 야하지 않고 정갈했고, 꽃송이가
크되 허술하지 않고 단아했으며, 시들어 떨어지되 변색하지 않고 우아했다. 그러나 동백꽃의 절정의 아름다움은 낙화에 있었다. 꽃이 지되 벚꽃처럼
꽃잎이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꽃송이 그대로 무슨 슬픔이나 서러움의 덩어리인 양 뚝뚝 떨어져내렸다. 변색하지
않고 떨어진 그 꽃송이들은 또 땅 위에다 새로운 꽃밭을 현란하게 이루어놓았다. 사무친 한을 풀 듯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두 번 피어나는
꽃이었다.
(222)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정권 인수와 국회 해산을 선언함과 아울러 장면
내각 장차관 전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주한미국 대리대사와 미8군
사령관은 불법적인 쿠데타를 부인하고 장면 정권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지지를 표명하고, 쌀값은 당일로 치솟아 혁명위에서는 매점매석하는 미곡상들을 극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발동하고, 장면 총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 행방이 묘연하고, 혁명위에서는
서울시내 각 경찰서장들을 중위 대위로 임명하고, 검열을 당한 신문들은 부분부분 먹통이 된 채 찍혀 나오고, 혁명 수행상 필요 시에는 체포, 구금, 수색을 영장 없이 집행한다는 포고령이 잇따르고 있었다.
(314-315)
“그건 당연히 박수를 받을 만큼 잘한 일이오. 조직폭력을 일삼아 시민생활을 불안하게 한 깡패들을 소탕애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국민의 기본의무를 기피해 개인의 이득만 추구한 파렴치한 자들을 색출해내 국가의 기강을 바로세우는 건 백 번 잘한 일이오. 그런데 그런 겉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 가지고 국민들이, 아니
이성적인 대학생들이 쿠데타정권의 부당성까지 망각하게 된다면 그건 큰 문제요, 무슨 말인고 하면, 지금 군인들이 진정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 그
저변에는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부당함을 하루빨리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기네 능력을 과시하고 민심을 회유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그거요. 그들이 참으로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그런 중요한 일들을 빨리 끝내고 군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하고, 그땐 온 국민이 박수를 치고, 박정희에게는 중장 진급이 아니라 국민의
이름으로 별 다섯, 원수를 달아줘도 아까울 것 없소. 허나, 지금은 감시의 시기요.”
(315-316)
“하 이거. 우리
아가씨가 본격적으로 나오시네.” 원병균은 싱긋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지금 그건 아무도 예측하거나 속단할 수 없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혁명공약이란 것에 밝히기는 했지만 그걸 전적으로 믿는 건 바보
중에 상바보요. 그건 모세가 받은 십계명이 아니라 자기들의 정치 목적을 위해 내세운 구호니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요. 다시 말하면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이미 쿠데타를 모의할
때부터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들이었고, 정치란 거짓말 올림픽이고 정치인들이란 거짓말 선들이라 그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시해야 할 것은 미국 태도요. 쿠데타정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현재의 미국 태도를 보고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호하려 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혁명공약을 믿는 것보다 더 바보요. 미국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허울뿐이고, 그들이
진짜노리는 것은 자기네들 말 고분고분 잘 듣는 기생 같고 하인 같은 정권인 거죠. 미국이 날벼락 맞듯
한국에서 쿠데타를 당했고, 그 불쾌감과 불안감 속에서 지금 쿠데타정권을 겁 먹이고 어르기에 한창 열중하고
있는 참이오. 그러다가 어느 때 서로 짝짜꿍이 되면 미국은 민주주의고 정권이양이고 싹 감추고 딴전 피울
거요.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고수의 금메달 감들이니까. 현재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약소국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뭔지 알겠소?
그 나라 지배자들이 모두 미국의 말을 굽실굽실 잘 듣는 반민주적 독재자들이라는 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