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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찌하여 이 땅의 권력을 쥔 자들이

또 다시 일본에게

이 땅을 팔아먹고

일본의 이익에

우리 삶을 예속시키며

일본의 군대가

이 땅에 상륙하는 것을

도우려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의 사자들입니다.

 

(8)

여러분! 친일파들을 물리칩시다.

현해탄 건너 그들의

고향으로 보냅시다.

밀정들을 동해 건너

그들의 조국으로 보냅시다.

 

(35-36)

명진스님의 사자후

도대체 만해가 없었다면 이천 년의 호국불교를 자랑하는 한국 불교계가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나라를 잃은 놈이 나라를 되찾는 데 헌신하지 않고 존재의 도덕성을 운운할 수 있냐 말이오. 민족의 해방 없이 어떻게 종교적 해탈을 운운할 수 있냐 말이오. 고귀한 종교적 경지? 다 헛말입니다. 불교계뿐 아니라 내외 전체를 통틀어 만해 스님만큼 뚜렷하게 항일운동을 한 사람이 없었어요. 천도교이건, 기독교이건, 유교의 선비이든 만해처럼 변절 않고 고고한 지조를 지킨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만해 덕분에, 체면치레라도 하고 사는 조계종 사람들이 만해를 존경하질 않았습니다. 시궁창에 내버려 두었어요. 만해를 역사의 잿더미 속에 덮으려고만 했어요.

그 와중에도 만해를 발굴한 것은 문학하는 사람들이었죠. 만해의 문학적 향기가 너무도 날카롭고 치열했기 때문에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겁니다. 만해는 일반인들에게 위대한 독립운동가니 심오한 종교적 사상가로서라기보다는, 감각적으로 탁월한 시인으로서 접근이 되었던 것이죠.

 

(67)

나는 개인적으로 김수영의 시의 세계를 사랑하고, 그 인간됨을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후학이지만, 김수영이 조지훈보다 더 진보적이라든가, 조지훈이 김수영보다 더 보수적인 삶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도무지 할 말이 아닌 것 같다. 수영과 지운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지훈이 한 살 먼저 태어났고,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시점에 비명에 갔다) 지훈이야말로 역사의 굽이마다 정확한 행적을 남겼다. 지훈은 지조를 목숨보다 아끼는 선비였고 수영은 자유롭기에 좀 퇴폐적인 성향을 가진 도시인이었다.

 

(130-131)

이 몇 권 안되는 시집의 출현은 모두가 그 나름대로 한국근대시의 정체성과 조선의 근대적 시형(詩形)을 창안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각기 자기위상이 있다. 그러나 <님의 침묵>의 출현은, 김춘식의 평가대로 “초창기 시문학의 전개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도약에 해당할 만큼의 파격적인 성취”라고 평가되고 있다. 나는 차라리 1920년대 초반에 출현한 시집들과의 비교를 절(絶)하는 독보적 가치와 형식과 주제의식을 유(有)하고 있으면서도 또 동시에 초창기 시유형의 모든 가능성과 연속성을 보유하는 특이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겠다. <님의 침묵>이야말로 조선인의 내면에 흐르는 시정(詩情)의 자연적 유로(流露)인 동시에 근대시의 독창적 아키타입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적 세계라는 좀 특이한 평어를 여기 남겨놓겠다. 1920년대의 어떠한 시들과도 <님의 침묵>은 비교될 수가 없다. <님의 침묵>은 너무도 심오하기 때문이다. “님”이라는 추상적 주제를 원융한 척수(脊髓)로 하면서 거기서 뻗어나가는 88개의 신경조식은 수억만 개의 뉴론세포의 화장(華藏)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화장세계의 케미스트리는 범용의 지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154-155)

이 모든 논의를 리얼하고 신실하게 만드는 것은 만해의 삶의 지조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혁명에 투신하였고, 지고의 선의 경지를 증득하였고, 시인으로서 고매한 언어를 구사하였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변절, 배신의 족적만 남겨도 위에 그린 삼각형들은 다 부서져 버린다. 멀리 산속으로 도망가 숨어 살면서 절개를 지키는 것은 혹 가할지 모르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살면서 호통을 치면서 당당한 지조와 타협 없는 절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면 그 경지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지훈은 만해의 절개가 그의 삶의 업적을 빛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진주임을 확인한다.

 

(158)

우리는 만해를 통해서 비로소, <독립 선언서>를 짓고도 자기 이름을 명단에서 빼달라고 비굴하게 요청한 육당이나, 창씨개명에 앞장서서 본인의 이름을 카야마 미쯔로오로 바꾸고, 황민화 운동,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며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본군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독려한 춘원이아, 타쯔시로 시즈오로 이름을 바꾸고 카미카제 같은 전쟁범죄를 찬양하며 조선청년들의 전쟁참여를 독려한 미당 서정주(1915~2000) 등등의 민족지도자들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만해의 시가 오늘까지 살아있지 아니하면, 일본 식민지강점시대의 암울한 저류를 흐르던 우리민족의 정의감이 그 좌표를 잃고 증발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176)

그러나 <서상기>에서는 최초의 무산지몽(巫山之夢)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남자중심의 기술이 아니라 여자의 주체적인 선택을 나타내고 있다. 여자는 더 이상 남자에게 “따멕히는” 존재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보다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다. 앵앵은 여러가지 방편을 통해 장생을 시험한다. 그의 상사병이 진실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위태로운 증세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이불과 베개를 먼저 보내고 장생이 누워있는 서상(西廂, 큰 건물의 서쪽 회랑)으로 나아간다. 앵앵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모든 것을 비우는 듯한 극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 자태는 곡패 “원화령(元和令)”의 운을 밟는 시로써 표현되고 있다.

 

(206-207)

20세기 일제강점이라는 사건은 메이지시대의 권력다툼의 분규 속에서 태동한 사쯔마 계열의 정한론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결국 알고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이 재현일 수도 있다. 그 망상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퇴각하는 일본함대를 남김없이 섬멸하기 위하여 이순신은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 땅에서 최후 일 척까지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임란의 의병의 활약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전투력이 출중한 부대가 승병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님들은 철학이 있었고 호국불교의 사명이 있었고, 무술에 능한 자가 많았고, 조직적 전투력이 있었다. 명령계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기네 불교와는 달리 대처가 아닌 비구의 순결한 전통을 지니고 있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역(易)이 말하는 바, 이간(易簡)스러웠다는 것이다. 일본침략자들에게 승병은 공포였다.

 

(236-237)

조선불료유신의 개혁을 꿈꼬고, 또 개혁의 실현을 위하여 8만대장경을 재편집하는 웅장한 작업을 하였어도 그것은 문자의 장난이었지, 자기가 추구하던 진정한 존재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했다. 존재의 자유는 생활의 자유로 표현되지만, 생활의 자유는 내면의 정신적 자유가 달성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적 자유는 스스로를 속박한 자박(自縛)의 상태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해방의 소리를 해풍 속에 쓸려가 떨어지는 잡물의 추락성 속에서 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객수(客愁)의 어설픈 고뇌가 사라지고 나 만해는 삼천계를 향하여 할파하노라! 백설(白雪)과 도화(桃花)의 편편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주의 실상일 때는 시공의 분별심을 초월하는 것이다. 복사꽃의 붉음이 흩날리는 백설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야말로 객수(客愁)가 사라진 고향의 모습이리라. 그것은 존재의 자유인 동시에 기나긴 방황을 거친 자기 삶의 족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298-299)

조선왕조 전체를 개관할 때, 한글이 언문이라 하여 비하된 듯하나 그 실용적 가치는 꾸준히 증가되었으며, 세종의 창제동기를 충분히 실현되어 갔다고 볼 수가 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글에 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방대한 한글자료들이 방치된 채 연구되고 있지 아니한 것이 현금의 정황이다. 백성이 권력기관에 항의하는 괘서들이 한글로 쓰인 예가 많았다 하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한글의 사용은 급증하였다고 한다. 왜놈들이 읽지 못하는 암호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광해군 이후로 왕후들이 청정(聽政)이 많았던 까닭에, 한글정치라고 말할 정도로 국정문서에 한글이 많이 등장하였다. (김일근 <언간(諺簡)의 연구(硏究)>, 건국대학교출판부, p.330)

 

(317)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 첫 구절을 읽고 더욱이 1925년 만해가 이 시를 쓰던 시점에서 읽고, 3.1만세혁명을 떠올리지 아니하는 자는 천치바보이거나 위선자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거부하며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만을 여기다 덧붙이면서 순수문학을 운운하는 자도 무뎌빠진 감상론자, 아니면 뉴라이트의 근대화론의 정당화를 위해 애쓰는 자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다. 물론 만해의 시가 위대하고 옹혼한 까닭은 개인의 사랑의 테마와 조국의 운명 혹은 코스믹한 해탈의 테마가 항상 병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님은 갔습니다”의 최초의 인상이나 최종적 의미는 역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환상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민족의 독립이 가능하리라 믿고 목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민중적 좌절감의 절규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조국은 사라졌습니다.

 

(347)

그러나 타고르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었다. 간디의 아이디어를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고 생각했고, 영국으로부터의 인도의 독립만이 장땡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립보다 인도인의 정신적 개화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간디를 독립이 곧 인도인의 정신적 해방을 가져오는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의 과정에서 인도인들은 근대적 가치를 배우고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타고르는 인도인의 기질에 배어있는 선민주의나 비합리성,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아직도 서구에서 배울 것이 많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357)

타고르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벵골의 구석에서 자라난 그가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와 정감을 알 리가 만무하다. 그러한 타고르에게 민족의 구원을 기대는 예언자적 시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타고르는 근원적으로 픽션이다. 그가 쓴 등불시는 타고르와 간디의 사상적 대결을 연상시킨다. 타고르는 모르는 상대로부터 시를 부탁 받았기 때문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최대한 부딪힘 없이, 최대한 안전빵의 시를 쓴 것이다. 그러한 허구가 조선역사 정취의 1세기를 장악하였다면 우리의 한 세기 그 자체가 허구가 아니겠는가? 내 말이 너무도 혹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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