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을 하는 여성들이 가부장제를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절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쉴라 제프리스는 자신의 수사학을 제 3물결 페미니즘과 거리 두기 위해 트랜스 혐오의 대중화를 시도했다.제프리스는 일회적으로 선별된 데이터와 광범위한 일반화로 경력을 쌓았다. 트랜스 수술이 가부장제의 중심임을 주장하기 위해 전환을 포기하고 성별을 극복했다는 극적인 전개만을 근거로 삼으며 (제프리스에게 트랜스 문화 안에서 안전한 공동체를 만나 정체성을 긍정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펼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예외다. 트랜스 혐오 담론이 소수자 공동체를 비가시화하고 소위 '주류에 섞이려고 하다가 낙오되는' 성소수자의 사례를 주목하면서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성정체성은 그것이 '비주류' 에서만 통용되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성별 이분법적인 아이러니를 보인다.)
레즈비언 공동체가 반 트랜스젠더 단체의 런던 프라이드 불용을 막기 위해 분열이 아닌 합류로서 커뮤니티 연대를 확장했다는 '불편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제프리스는 트랜스 배제 행동주의를 강화하는 집단에 소속돼 해당 집단의 활동가인 재니스 레이먼드의 저서를 적극 옹호한다. 레이먼드는 반 젠더주의 단체의 트랜스젠더 의료는 자본논리만을 위한 행위라는 공중 보건 음모론을 펼치면서 트랜스 의료를 처단할 것을 주장했고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은 가톨릭 윤리학자인 레이먼드의 증오를 정부의 입장으로 채택해 트랜스젠더 인구가 의학적으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도록 강제했다.
제프리스에 논리에 의하면 '어쩔 수 없는 젠더 희생자의 죽음'인 트랜스 커뮤니티의 공공 및 민간 보험 자격의 박탈과 당사자들의 죽음은 2012년 LGBT+ 인구 전체의 자살 동기 상당 부분이 주류에 의한 소수자 낙인과 스트레스라는 정부 보고서를 통해 '치료에 대한 차별적 장벽이 없다면 자살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증거를 뒷받침하여 정부와 극단주의 단체의 핍박으로 인한 "강제된 죽음"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제프리스는 1900년대 성별 이분법으로 인해 고정된 여성성을 거부하기로 했다는 자신의 경험을 젠더 퀴어의 젠더비순응 경험과 동일시하며 성전환 수술이 소련의 정치적 정신과에 비유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 비바이너리 정체성 문화가 대두되는 21세기 사회에서 제프리스와 극단주의 집단이 주장하는 여성 남성의 '본질성' 은 실존하는 비바이너리 민족성을 부정하고,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돌아가 젠더 퀴어를 포함한 모든 성별이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거짓으로 구성된 성별 개념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생물학적 본질주의는 임신과 출산 같은 생물학적 제약에서 벗어나야만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론으로,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모든 여성의 경험을 생물학적 제약에 바탕해 획일화시켜 결속하는게 필수적이므로 섹스와 젠더의 경계를 흐리는 비바이너리의 존재에 훼방을 놓는다. 제프리스에 의하면 FTM 트랜스젠더는 여성 혐오의 '희생자'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남성 우월주의에 순응한다. 하지만 이는 생물학적 제약을 파기함으로써 본질주의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트랜스젠더를 '희생자'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트랜스젠더가 사회적 구성에 맞서 사는 방법을 알아내는 적극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프리스 자신이 보수주의 사회에서 여성성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고통받은 경험을 다른 세대, 민족, 인종, 계급, 종교, 공동체 일원의 경험과 합일화하며 90년대의 본질주의 논리의 허점에 위협되는 젠더 퀴어의 사회구성주의 견해를 제거하려 드는 것은 본질주의 가정을 무사히 수호해야만 이론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프리스는 여성성을 억압성, 남성성을 진취성으로 분리하며 현대 섹슈얼리티 일체를 거부하고 성소수자 클럽의 하위 문화가 레즈비언 문화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피력한다. 섹슈얼리티의 전복과 성혁명 자체를 '주류'에서 분리하고 남성성을 '주류가 성취한 근본적인 성질'로 규정함으로써 성별 이분법 폐지가 아닌 이분법에 본질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전개한다. 퀴어 클럽의 복식이나 댄스, 음악을 포함하는 퀴어 문화의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는 이분법에 녹아들며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했고 이분화된 섹슈얼리티를 주변화하고 젠더가 사회의 생산양식과 관련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제프리스가 주창하는 '본질성'이란 이성애 문화의 고정된 섹슈얼리티와 정체성을 불변의 것으로 여기며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를 수행하는 사람이 바이너리에 저항하고 공연하는 행위자로써만 자신을 정의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제프리스는 본질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주체가 생물학적 규범에 의해 형성될 뿐이라면 그토록 열망하는 '해방'은 생물학적 규범의 지배로 인한 사회적 검열로 종속된 주체를 생산하고, 고정관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억제한 여성들을 일체된 경험으로 결속시키지만, 가톨릭 이성애 본질주의자들의 지배계급 논리 강화로 이용되는 자승자박 본질주의의 지속적인 복원으로 인해 지배 관계의 '찬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에 제재받는 주체로 거듭날 뿐이다.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 권력을 다루는 획일화된 이론을 거부하고 인종과 계급에 대한 섣부른 가정을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논파했다. 실천 지향 페미니즘의 역사가 보인 정체성의 폭력에 대항하는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 반드시 보편적인 '여성'의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오드리 로드는 말했다. "인종차별적 가부장제의 도구로 인종차별적 가부장제가 낳은 결과를 성찰한다는 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 800명의 페미니스트들이 모인 자리에 흑인과 레즈비언을 다루는 세션이 고작 한 개였음을 두고 한 말이다.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나는 흑인이고, 흑인 공동체에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억압에 위계란 없다."
제프리스의 자매애는 무엇인가. 로드는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맞물림, 교차지점을 스스로에게서 끌어냈다.
자기 경험의 언어화, 보편성을 거부하는 정체성의 규정은 '자매애'를 통해 차이를 메우고 결속을 다지려고 했던 백인 페미니스트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효과적인 정치적 행동에 '범주의 통일성'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보편 범주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 일원' 자체가 자신들의 정치에 위협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며 차별을 은폐하는 결속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여성'을 다시 생물학적 본질에 합일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제프리스는 사회적 지배관념으로 반복된 이상적인 규제를 마치 '태어날때부터 자연스럽게 조작된 것으로 회귀하는' 것 처럼 위장하며 '여성'을 '남성'에 대적하는 이분법적인 실천주체로서 제한한다. 이 또한 사회구성물인 젠더를 거부하고 '보편범주'의 여성을 집합시키는 논리이기 때문에 다시 공허한 본질주의로 되돌아간다.
버틀러는 말했다. "-나는 '타고난'이 단어에 정체된 무언가의 의미를 전달하리라는 것을 이해한다. 나는 다른 어휘가 똑같이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나는 '선천적인' 성별, 인종으로 인한 열등감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려고 할 때 그들이 사회적 현실을 자연스러운 필요성으로 '고정'하려고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본적이고, 지속적이고, 필요한 차원을 가리키는 언어가 필요하며 성적 구체화의 감각은 정확히 그것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별이 없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성별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로써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호주 원주민 공동체는 제프리스의 멜버른 대학교 재직 시절, 트랜스 여성을 인종차별주의에 연예인에 비유하는 기이한 발언을 비판했다. "인종차별,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그리고 트랜스 혐오적인 사람들이 제프리스의 발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원주민 및 비원주민들에게 이러한 편견을 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습니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성별에 대한 극적인 모방으로 축소하는 것은, 내가 젠더퀴어 원주민으로서 젠더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보다 제프리스의 편견을 더 반영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인종적 구성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나의 문화에 고유하고 정당한 방식으로 성 정체성을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