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 소설이 사회주의/시오니즘과 자유주의/자본주의 간의 체제 경쟁을 상징하는 두 형제(이스라엘 정착을 선택한 이념형 인간 아하론 할아버지와 미국으로 가서 성공한 현실주의자인 그의 쌍둥이 형제 예사야후) 간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막 혼자서 예상하며 읽어갔다. 사회주의/시오니스트 사회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괴짜 할머니의 독특한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갈등의 해소를 암시하는 뭐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겠지 하는 섣부른 추측과 함께... 그러나 그 갈등이 깊이있게 전게되기를 기다리며 전반부를 지루하게 읽어나가다던 나는 점점 이 소설이 심지어 이스라엘의 중요한 한 역사적 지점의 전체적인 시대상을 살만 루슈디의 방식으로 그려보여주는 소설도 아닌, 단순히 성격이 약간 독특한 자신의 할머니와 가족사에 대한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회고담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중간 쯤에 접어들면서는 이 소설을 그만 접을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게된 이유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 소설이 점점 재미있어지기 시작한다는 사실과 이 소설의 정체가 궁금했던 탓이다.
결국 나는 이 이야기가 그리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 아니며, 작가 개인의 가족사에 대한 향수 어린 회고담에 가깝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설의 작은 묘미는 청소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보이는 할머니의 강박장애와 그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관대하고 따듯한 시선에 있다. 나라면 키부츠의 집단주의를 거부하는 할머니의 '자유주의적' 태도가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독재적이었는지, 그 아이러니에 대해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서 가끔 어딘가로 "도망을 가버리는" 아하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례식 직후, 오로지 청결 유지를 이유로 평생 출입을 금지당했던 침실의 소파와 침대 위에서 껑충껑충 뛰었던 어머니와 이모의 심정에 훨씬 더 공감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 추억담이라고 해서 1930년대 이스라엘의 한 부분에 대한 멋진 풍속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어쨌건 우리에게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나치의 '피해자' 혹은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가해자'라는, 분명 중대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다소 경직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켜줄 그림들이 아주 많이 부족한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전체적인 그림이라는 것도 작은 세부들을 무시하고 그려질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사족: 이 책을 읽고나면 막 청소를 하고싶어지는 효과가 생긴다. 토니아 할머니 덕분에 나도 간만에 집안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