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가족 안에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기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부모의 시간이 귀중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우리는 항상 돈 대신 시간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험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간혹 휘청거렸지만 이 선택이 오늘까지 이어졌다.
남편이 회사에서 일주일에 36시간 근무를 40시간으로 늘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이들도 다 컸으니 하루에 30분 더 일한다고 사생활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맘대로 해. 일이 재미있으면 더 해. 하지만 돈 때문에 더 하지는 마. 우린 지금 버는 돈도 다 못 쓰는데."
"집에 일찍 와봤자 신문이나 읽고 노는걸."
"신문이나 읽고 노는 건 안 중요해?"
신문이나 읽고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남편은 일을 더 하지 않았다(몇 달 후에 회사에선 남편을 일주일에 40시간 일해야 하는 위치로 승격시켰다. 그것은 또 다른 책임감과 성취감이 따르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남편을 위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22쪽
나는 소중한 존재이고 내 노동력 또한 소중하기 때문에 그 평가를 남에게 맡기거나 돈으로 재고 싶지는 않다.
그 대가로 우리 부부는 학력에 비해서 적은 보수와 실력에 비해서 낮은 사회적 위상을 떳떳하게 감수한다.또한 무섭게 절약한다.다달이 기본적으로 생활비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람은 생존이 부담스럽고,선택의 자유가 줄어들고,물질의 고마움을 모를 것이라 믿고 있다.그 덕에 항상 돈이 남는다.돈 쓸 일이 생기면 편안하게 쓸 여유가 있어서 오히려 남보다 부자라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23쪽
자유를 구하기 위한 검약의 습관은 2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부부 사이에 유별난 동지 의식을 키웠다.파트너를 향한 존경과 신뢰를 담은 이 동지의식은 우리 가정의 큰 버팀목이다.-24쪽
한국 사람에 비하면 독일인들은 정말로 검소하고 실속 있게 돈을 쓴다.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절약을 미덕으로 알고,쪼잔하다면 쪼잔하고 검소하다면 검소한 모습으로 비슷하게들 살았다.돈이 많다는 걸 과시하는 가정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절대적인 소수로 근검한 이웃들 사이에서 비웃음의 대상이었지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33쪽
불어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설거지는 교직원들이 스스로 한다고 했다.그 말은 우리가 설거지거리를 남겨놓고 가면 선생님들은 학생들 행사에 자신들의 휴게실을 빌려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그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올까.결국 학생,우리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릇을 나르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동안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실내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남편이었다. 그의 옆에도 다른 여성들이 쭐레쭐레 붙어서 눈치껏 일을 돕고 있었다. 내 남편은 이 파티에 참석한 유일한 아버지였다. 돈이 많거나 직책이 높아서 항상 바쁜 다른 부모들과 달리 그다지 책임이 막중하지 않은 직책에 있어 이렇게 아이들의 학교 파티를 위해 결근할 수 있는 나와 남편의 처지가 새삼 감사했고, 선수급은 아니더라도 일용할 양식을 제 손으로 요리하고 치울 수 있는 우리 실력이 자랑스러웠다 -40-41쪽
"어라? 고등어 먹는 게 왜 변태야? 개고기는 괜찮고 고등어는 변태야? 자기는 독일 사람이니까 생선 안 먹고 자랐지.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고등어가 고향 음식이란 말이야."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으이그, 그럼 나도 먹지 말라는 소리지. 그냥 안 먹고 말지. 어떻게 나 혼자 먹으려고 고등어를 굽겠어? 근데 당신 말이 맞네. 알았어."
독일 연안인 북해에서 잡은 새우는 지구를 빙 돌아 인건비가 싼 아프리카에서 껍질을 까서 다시 독일로 돌아온다.운송에 막대한 에너지가 들어도 그게 독일에서 까는 것보다 비용이 더 싼 것이다.다른 대륙에서 재배해서 운송한 딸기가 독일산 제철 과일보다 더 싼 것도 같은 이치다.같은 사람에게 나라에 따라 각기 다른 값을 매겨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화의 세상은 분명히 비합리하고 비인간적이다.
-63쪽
푼돈으로 일상을 꾸려야 하는 아줌마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값싸고 질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싼 가격에 혹하는 구두쇠 기질이 문제가 아니라 값싸고 질 좋다는 함정에 빠지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변태적 사업에 일조하게 된다는 걸 모르는 게 문제다.세상이 모두 그렇겠지만 독일에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시장에 다니는 사람,알아도 작은 가격 차이에 넘어가 그런 사실을 모른 체하는 사람들이 많다.나 역시 그랬다.내가 시장의 주인인데 앞으로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절대로 변태 딸기를 사지 말아야지.그게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길 아닐까.-64쪽
환경보호도 마찬가지다.원자력 발전소의 높은 굴뚝에 매달려 시위하거나 원시림의 원목을 수입하는 대형 선박에,또 고래 사냥을 하는 선박에 고무보트를 타고 바싹 접근하는 그린피스 행동대원들의 용기 못지않게,조용히 실천하고 있는 나의 일상 역시 값진 일이라고 믿는다.
야채나 과일 씻은 물을 모아 마당의 화초에 물을 주고,장바구니를 늘 챙겨가 물건을 살 때 딸려오는 비닐봉지를 거절하고,귀찮더라도 쓰레기를 분리하여 멀리 있는 공동 수거장으로 가져가고,재생지를 사용하고,원시림에서 벌목한 나무로 만든 가구나 생활용품을 피하고,생산에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은박지와 알루미늄 캔 음료를 피하고,겨울에는 난방을 덜 하려고 집안에서 스웨터를 입는 나의 사소한 일상을 다른사람의 무용담과 비교하여 하찮은 일이라 과소평가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태끌인 나에게 태산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70쪽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야.암만 친한 친구라도 매주 만나지는 못하거든.그렇게 자주 보는 사람들과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엔 인생이 좀 아깝다고 생각해.가끔 편안하게 앉아서 대화하는 기회를 가지면 우리가 매주 만나는 시간이 좀더 즐겁지 않겠어?"
-73-74쪽
우리 가족이 화목할 수 있는 비결은 참으로 사소하다.바로 세끼 식사를 온 식구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비결이라 하기엔 대단치 않아 보이겠지만,독일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우리 부부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 있다. 남편은 학교에서 갓 돌아온 아이들에게 학교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버지로서 대단히 유익하다며 매일 점심을 집에서 먹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회사 동료나 상사와의 친분에서 오는 이익은 포기할 수 밖에 없다. 프리랜서로 문화재를 실측 조사하는 나 역시 먼 곳에 있는 일거리는 웬만하면 거절하다 보니 일감이 오래 끊어지기 일쑤다.하지만 그럴 때면 글 쓸 시간이 많아져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절약하며 살기 때문에 돈이 더 필요한것도 아니고, 남들눈에는 별볼일없을지라도 우리 스스로 하는일에 만족하고 있기에 승진이나 출세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더 이상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데,가족과 함께하는 점심시간의 행복을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80-81쪽
그래도 세상에 열 번 울다가 한 번 방긋 웃는 아기 얼굴만큼 소중한 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한 우리 부부는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긍심으로 도도했다. 우리에게 깊은 사랑을 보내는 아기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한없는 신뢰를 받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의 눈빛은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딜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제시하는 이정표였다.-83-84쪽
지금은 둘 다 예전의 꿈과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그렇지만 돈은 못 벌어도 시간이 넉넉한 일,즉 우리 인생관에 어울리는 일이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돈이 아니라 부모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었던 걸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풍요로운 인생을 맛볼 생각도 못 했을 것 아닌가?
-85쪽
우리도 초보 부모인데 자식의 앞날이 불안하지 않을리가 있나?그렇지만 아이들의 성적에 참견해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잊을 수는 없었다.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모의 도움으로 잘 사는게 아니라, 부모의 도움 없이 잘 사는 것이기에.
성적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우리가 교육에 무관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자녀 교육은 남편과 내 인생에서 늘 우선순위이다.단지 우리는 아이들이 본능적인 열정으로 공부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갓난아기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뒤집기 연습을 열심히 하듯이,어린아이들에게도 스스로 열정을 바치는 놀이들이 있다.우리 아이들은 레고나 인형 놀이같이 스스로 택한 프로젝트를 할 때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몰두했다.그것을 보고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학습은 없다고 느꼈고,어떤 선생님도 이보다 더 잘 가르칠 수는 없다고 여겼다.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의 놀이를 진지하게 보호하고,행여 아이들이 도움이라도 청할라치면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 도와주었다.이런 것이 바로 영재교육 아니겠는가?
-94쪽